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 - 세계 1위 미래학자의 코로나 위기 대응책
제이슨 솅커 지음, 박성현 옮김 / 미디어숲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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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선택할때는 제목을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책이 그렇다.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을 제대로 읽지 않고 책을 선택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후, 이런 유형의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왔고, 나는 코로나19의 최전선 중 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내용은 굳이 책으로까지 읽고 싶지 않다. 다만, 경제적인 측면의 변화에 대해 쉽고 빠르게 기초를 습득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렇게 섣부른 마음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사실 내가 찾고 있던 책은, 같은 저자의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책이었고, 그 책은 이미 samsung에서 무료로 제공한 교보 e-book이었다. 어쨋거나 서평도서로 이 책은 내 품에 왔고, 드문드문 나는 이 책을 발췌하여 완독을 하였다.

 사실 너무나 뻔한 내용이라서, 많은 내용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침체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응이란 뻔하지 않은가. 배우고, 성장하고, 준비하라. 견디고, 때론 도망치고, 투자하라.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까가 아니라, 어떤 분야가 생기고 사라질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미래의 그 순간에 살아남기 위한 ​커리어 전략​'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내용이 구태여 도움이 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 배움의, 성장의, 준비의, 견디기의, 도망치기의, 투자하기의 세세한 팁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책의 전체 내용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선 제목을 쭉 훝어보라. 그리고 자신이 필요한 내용은 세부적인 글들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라. 그것만으로 이 책을 만난 충분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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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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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12세 관람가의 한 영화를 보러갔다가 처음 알게되었다. 추석연휴라 영화관을 찾은 손님들의 대부분이 가족단위였는데, 이 작품의 제목이 화면에 뜨는 순간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관람관이 '헉'하는 소리로 가득 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고는.. 책 표지에서도 느껴지지 않는가, 제목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달콤하고 풋풋한 무엇인가가(이 작품도 12세 관람가였다). 제목이 너무 충격적이라, 일본연애소설이 궁금해 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아니지, 연애소설이 아니었다면 표지도 못 들여다봤을 제목이라는 쪽이 더 맞는말인가?] 그와는 별개로 굉장히 오래 읽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 혹시 스포일러에 예민한 분이라면, 스크롤을 그만 내리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럼 문제의 제목부터 풀이해볼까(??). 일단 '췌장'은 '이자'의 다른 이름이다. 소화효소와 혈당조절과 관련한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으로 기억하고 있는​)인데, 이런건 어차피 이 작품과 별 관련있는 내용은 아니고,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사쿠라'가 췌장에 병이 있어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과, 어느날 그녀가 '나(남주인공)'에게 던진 '이상한 고백'이 이 책의 제목이 되어버렸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거든. 옛 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대."

"근데 그게 뭐?"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라고 이야기하니까, '뭐야 별 것 아니었잖아'라는 느낌의 글이 되어버렸는데, 사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문장은 이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벼운 의미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음, 요컨데 '사랑해.' 아니, 그보다 더 깊고 농밀한,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은 절절한 감정(..은 내가 잘 모르겠어서 실패.)을 오직 두 사람의 언어로 표현해 낸, 두 사람만의 '유일한'....으음..(에잇, 관두자.) 뭐, 여하건 그렇다. 대체 리뷰를 왜 시작했지, 나.


​"누군가 나를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신앙도 외국에는 있다던데."

 이 문장이 조금 도움이 될까. 나는 마지막 순간, 간절함으로 전해진 그들의 진심(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을 꽤 초반에 언급된 이 문장의 힘을 빌려 이해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접점이 없는, 완전히 반대의 존재였다. 활달하고 누구에게나 인기있는 소녀인 '사쿠라'와, 차분하고 혼자 있길 즐기는 문학소년 '하루키'. 하루키가 병원에서 우연히 사쿠라의 '공병문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둘의 관계는 대화 한 마디 없이 끝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키가 사쿠라의 공병문고를 집어들기로 결정한 순간, 모든 것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이좋은 클레스메이트,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는 분명 나에게 진실과 일상을 부여해줄 단 한 사람일 거야. 의사 선생님은 내게 진실밖에 주지 않아. 가족은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과잉반응하면서 일상을 보상해주는 데 필사적이지. 아마 친구들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게 될 거야. 너만은 진실을 알면서도 나와 일상을 함께해주니까 나는 너하고 지내는 게 재미있어."

 하루키는 사쿠라에게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좀더 의미있는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하루키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매번 "선택"했다. 그녀의 말을 빌려 '길지 않은 그녀의 남은 인생을 의미있는 것에 사용하는 일을 도울 기회'를 그에게 부여한 것이다.


​"..(중략).. 비밀을 알고 있는 클레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괜찮다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낼 거야. 얼마 전까지 아르바이트도 했고 저금해둔 게 많아서 다 써버려야 하거든."

 죽기 전까지, 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런 뜻일 터였다.

"그건 더 안 되지.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써야 해."

"이것도 의미가 있어. 나 혼자 숯불구이 먹어봤자 별로 재미없잖아? 나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는 거야."

 솔직히, 두 사람의 감정의 변화나 삶의 변화보다도, 나는 이런 구절들이 더 눈에 띄었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인 '사쿠라'의 삶을 대하는 태도일까. 사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증명해 온 사쿠라가, 스스로의 불안을 잊기위해, 또 사람들에게 가여운 아이보다는 밝고 명랑한 아이로 인식되고 싶은 마음에 한 (그러니까, 타인을 의식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그녀의 대사들은 소위 '불행'과 '의미있는 일'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절정을 맞은 것은 '사쿠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모두가 췌장의 병으로 인한 죽음을 기대했을 테지만, 사쿠라의 끝은... '묻지마 살인마에게 희생'되는 것으로 찾아왔다.


​최소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내일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다.

나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그녀에게는 당연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식이었던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명만은 이 세상이 잘 봐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없었다.

세상은 차별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향한 '동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와 마음을 통하며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사쿠라는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하루키를, 타인의 생각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하루키는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쿠라를. 나는 네가 되고 싶어. ​그래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최고의 사랑고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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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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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뭘까, 처음부터 끝까지 쉼없이 우중충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조'는 어려서부터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난해한'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사실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의 연결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익살'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선택했다. 그것은 꽤 잘 먹혀들었고, 요조는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감추면서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인정했지만 그 그림은 다케이치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

 단 한 사람, 다케이치만 빼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조는 이렇게 서술했다. 다케이치가 자신의 연기를 세상에 폭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 유일하게 요조의 본성을 볼 수 있는 친구, 다케이치는, 문자 그대로 요조의 유일한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의 '도깨비 그림'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친구. 그에게 '위대한 화가'라는 예언을 해 준 유일한 인물. 하지만 아쉽게도 둘의 인연은 요조가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요조의 '인간 실격'을 향한 곤두박질이 시작된다.

 시작은 '익살이 더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던 '호리키'라는 한 미술 학도와의 만남으로 가속되었다. 술, 담배, 창녀, 좌익 사상... 솔직한 감상으로 요조의 마지막 수기, 마지막 마침표까지 이어지는 남은 긴 내용을 나는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끝없이 굴러떨어졌다. 읽는 사람조차도 한 틈의 빛 조차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가혹할 정도로 이어졌고, 어느 틈엔가 우울감이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다가오는 느낌조차 받았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순간의 희망도 없이 맞물려갈 수 있을까. 이것은 옳지 못한 선택을 반복한 요조의 책임인가. 정말로, 그렇게 말해야 할까.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에 떠밀린 듯 정신없이 굴러온 요조의 삶은 한 정신병원에서 광인(혹은 폐인) 낙인을 받고, 큰형이 약속한 시골집에서 다시 고요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삶은 마지막 장에 도달해 있는 것과 다를바 없었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말소되어 영원한 정적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으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중략)..만일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의 친구였다면 나 역시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극단적이고 자극적일만큼 혼란스럽지만, 또 그만큼 공감되는 소설이었다. 요조가 그리고 싶었던 '도깨비 그림'은 무엇일까. 가식으로 가득 찬 '난해한 인간의 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 그래서 익살로 자신을 감추어야 했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케이치에게만 보일 수 있었던, 요조의 본성. 가식 아닌 진심.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던 호리키조차 철저한 이 세상의 사람임을 알았을 때 요조가 느꼈을 허탈감. 그가 술과 약물, 여자에 정신없이 취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나는 모르는 것 같지 않다. 죽음이라는 선택지조차 생각보다 멀고 험난한 곳에 존재했기에, 현실에서 찾은 죽음의 대안책. 자신의 유일한 방어책인 익살을 빼앗긴 요조에게 '죽음'외의 선택지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걸지도.

 인간의 자격이란 뭘까. 계속 해서 이 문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다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을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요조는 정말 '인간 실격자'인가. 정말 그 평가기준은 올바른 것인가. 그를 인간실격자라고 말해야하는 우리는 모두 사실  '다케이치'를 갈망하고 있는 고독한 존재이지는 않은가. 다시 묻는다. 정말 그는 '인간 실격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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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박장애입니다
쓰쓰미 료지로 지음, 장은정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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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년만에 가져온 서평으로는 뭔가 엄한 주제인 느낌이지만, 2019년 첫 완독 책이 그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교보 sam서비스로 두 번이나 대여하고도 안 읽고(..) 내팽겨쳐 두었다가, sam구독 해지를 하면서 밀리에는 해당 책이 없어서(...?) 이제서야 이걸 3일만에 완독했다. 강박증과 관련한 책들을 이전에도 몇 권 읽었지만, 보통 '전문가'느낌 풀풀 나는 '지루하기만 하고, 그다지 도움은 안되는 책'이 대다수였기에 별로 기대감이 없어서 더 그랬다.

 하마터면 아쉬울뻔 했다. 이 책은 강박장애를 직접 겪고 그것을 극복해 온 누군가의 기록이다. 하나의 정신질환을 학문적, 의학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함께 해 온 누군가의 이야기. 강박증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병부터, 인식, 극복과정까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나는 강박장애입니까?


 내가 강박증과 관련한 책들을 찾아 읽었던 것에는, 내가 (개인적으로만 좀 불편한) 강박증세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도 드문드문 기록되어 있듯, 나는 그것을 위해 명상을 배웠었고, 수차례의 좌절도 겪어오고 있다. 외부적으로 보이는 특별한 이상행동이 없고, 병원을 통해 진찰받은 결과도 아니기에, 스스로도 '그냥 핑계처럼 휘두르고 있는 합리화'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종종 하지만, 강박장애 판정을 받은 적이 있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병원을 가보라'고 진지하게 권한다는 것은 역시 완전 남 일은 아닌 것 같다.

​ 이처럼 '나중에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을 걱정하고 연연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시 그런 상황에 놓이면 어찌할 바 모르는 심리 상태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강박장애 증상의 특징이다. (32쪽.)

 사실 누구나 '강박'을 조금씩은 가지고 살아간다.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시키며, 때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오히려 강박이 없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대다수 정신적 장애가 그러하듯, 그것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것은 병이 된다.

 나는 강박장애일까? 나는 어릴적부터 무의식적으로 '강박을 끊어내는 단어'들을 사용해왔다. 이 문장을 여기다 집어넣으니 '태생 강박장애'같아졌지만, 오히려 반대다. 비효율적인 시간낭비를 칼 같이 끊어내는 기계같은 아이라는 소리로 해석해주면 좋겠다. 이미 끝난 일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사전에 없는 문장이었고, 모든 걸 쏟아부어 결과물을 내었으니 내 손을 떠난 결과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확인,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싫은 무의식이 모든 것을 눈 앞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고, 통제를 벗어날 것들은 처분하는 월래행사를 치르게 하고 있다.) 철저하고 완벽에 가까운 통제아래 마땅히 기뻐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나의 강박관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상행동(강박행위)으로 거의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역시 요즘의 나는 강박관념에 고통받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 강박관념의 원인이 되는 '선행자극'이 삶 그 자체라서, 인 것 같다. 손을 반복적으로 씻는다면 세면대에서 벗어나면 된다, 문이 잘 잠겼는지를 수십번씩 확인하는게 문제라면 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나의 선행자극은 어느 곳에서 시간의 간격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내가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물리적인 어떤 것이 아닌, '생각' 그 자체이다.


​확인강박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엇이든지 엄밀하고 정확하게 확인하고 행동하려는 것을 지향하며, 그것을 나중에 자신의 기억으로 확인할 수 없으면 불안을 느끼는 상태'다. (127쪽.)


누구나 다방면의 일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강박관념 때문에 괴롭더라도 일단 시작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에 집착하는 병적인 사람의 사고법을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이론적으로 독단한다는 특징이 있다. (128쪽.)

"한 번 신경이 쓰이면 그것에 속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생각한다."라고 털어놨더니 "그러니까 생각의 전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군요."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76쪽.)

 나에게 생각이란 '내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길잡이'이다. 그러니 적당히 타일러서, 간격을 만들어두는 걸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가 어렵다. 아무리 간격을 두고, 전환을 일으켜도 물리적인 증거도 없고 평생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살았기에 결국은 되돌아가고 만다.

 재미있게도 이 책에 소개된 극복방법에는 내가 명상에서 배웠던 기술들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나 시간의 간격을 만든다는 말은 정말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다. 결국 "무시하는 능력"이 답이라는 것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명상을 그만두기로 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끼고 있다. 명상이라는 행위자체가 오히려 나를 '강박'이라는 단어에 묶어두었고, 그것을 계속 떠오르게 함으로써 무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명상을 시작하는 분이 있다면 [뜬금없지만] 나는 말리고 싶다.

​실제로 곤란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이치에 맞지 않는 일, 잘 생각나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넘겨버린다. (178쪽.)

 재미있다. 요즘 내가 일상에서 품고 살아가려고 하는 문장이 이 책에 정확한 활자의 모습을 하고 누워있었다. 강박이란 싸우려들수록 더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힌다. 그냥 조금 성가신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른다는 느낌으로, 적당히 알은 채 해주고 적당히 무시해주면 의외로 조용하다. 가끔씩 자주 우냥냥거리며 뛰어다니면, 아마 이미 익숙해져있을 이 상황을 감내하는 수 밖에. 불안도 굳은 살이 생기나보다.

 이 문장이 주는 무력함과 멍함만으로 충분히 불안하지만, 그 불안마저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강박이 아니라도 내 머릿속은 항상 온갖 생각들로 넘쳐났기에, 종종 궁금하다. 타인들도 이렇게 많은 생각들과 함께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적당한 멍함과 무력함이 대다수 일반인의 기본값인걸까.

​결국 강박이란,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아닌, 타협하고 협의하여 함께 살아가야할 존재이다.

물론 사라져준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정도 마음가짐으로도 한결 편안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가 아직은 '정신건강'에 대해서 쉬쉬하는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덕분에 그만큼 자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안내자는 되어줄 수 있지만, 실험해볼만한 솔루션을 제공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참고도서나 검색어를 첨부하고 있는데, 모든 책은 한국어 번역이 안되어 있고, 검색어도 우리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듯 하다. (전혀 딴내용이거나 전혀 아닌 것 같은 검색결과만 나온다.) 이 책만 달랑 추천해주기에는 다음으로 나아가기가 너무 어렵다고 할까.

 [슬픈일이지만] 이젠 누구에게나 더이상 '정신건강'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이 와버렸다. 좀더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좀더 다양한 정보들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 날이 오면,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 책을 선물해 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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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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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굉장히 흥미진진한 '책 속의 문장(으로 추정되는 한 실험)'과 함께 이 책의 제목을 소개해서, 홀린 듯이 읽게 되었다. 하지만 무려 한달이나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디에서도 그 실험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했지만, 뭔가 속은 것 같은 이 기분 뭐지.

 내가 이 책을 읽게 한 실험은 '미모사'라는 식물을 가지고 진행했던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은 '사과와 튤립, 대마초, 감자'였다. [미모사 비슷한 것도 안 나옴.]​ 어쨋든 이 이야기는 그만 두고, 책 이야기를 해보자면, 시작부터 모든 것이 충격적인 책이었다.

​ 우리 인간은 다른 생물 종이 품고 있는 의도와 욕망의 객체가 될 수도 있고, 다윈의 정원에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꿀벌일 수도 있다. 영리하지만 때로는 부주의하고 또 놀라울 정도로 이타적인 꿀벌. (35쪽.)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과, 움직일 수 있지만 의식이 없다고 간주되는 동물, 그리고 보통은 그 이하의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류, 식물, 곤충 등등. 이 책은 그 중 '식물'의 시선을 담고 있다. 우리가 어쩌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식물과 인간의 공생관계'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우리 인간을 이용해왔는지에 대해서.

 사실 읽는 내내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은데, 한 달이나 책을 읽었더니 [읽는 중에 이사도 하고, 멘탈도 꺼냈다 넣었다 반복도 해보고, 새해도 맞이했다. 허허.], 붙여놓은 포스트잇만 많고, 나의 의식은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정작 이 공간을 채울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나 역사적 이야기가 많은 튤립과 대마초의 내용은 부스러진 정신과 함께 날려먹었고, 역시 내 입장을 온전하게 정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GMO문제를 담은 감자는, 그냥 좋은 상식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식물육종관련 연구를 하는 친구에게 언젠가 몬산토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복습을 한 기분도 들고, 괜히 내가 먹고 있는 프렌치프라이가 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머리는 알아도 마음이 안될 때라는게 있잖아...]

 그래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가장 많이 주변사람들에게 떠들어댔던 '사과'이야기를 조금 할까한다. 그넘의 '조니 애플씨드'가 뭐라고, 왠지 귀여운 느낌이라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음ㅋㅋㅋ ​라곤 하지만 사실 조류독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 사과나무는 사괴 씨에서 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과 씨를 심어서 키운 나무에서는 그 씨를 품었던 사과와 전혀 다른 사과가 열린다. 이렇게 열린 사과는 거의 대부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시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열리게 하려면 접붙이기를 해야 한다. (47쪽.)

 접붙이기가 아니라 씨를 심어서 사과나무를 키우고 이를 통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려는 열품이 몰아치던 당시에 미국 사람들이 개발했던 사과 특성의 혼합은 놀라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혼합 특성은 그때 이후로 대부분 사라졌는데, 그 사과 박물관에서 나는 바나나 맛이 나는 사과나 배 맛이 나는 사과를 보았다. 향신료 맛이 나는 사과,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사과, 레몬처럼 상큼한 맛이 나는 사과, 견과류처럼 기름기가 많은 사과도 있었다. 무게가 500그램이나 되는 사과도 있었고, 어린 아이의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사과도 있었다. 색깔도 제각각이었다. 노란색, 녹색, 적갈색, 보라색 등이 있었고 심지어 파란색도 잇었다. 점박이 있었고 줄무늬도 있었다.​ (100쪽.)

​ !!! 인간의 유전적 다양성이라고 해야, 우리의 모습은 제각기 기괴할 정도의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이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것 같다. [그것보다 파란 사과나 점박이는 왠지 찝찝할 듯.]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과라는 것은 빨간색의 한 손에 꽉 잡히는 사이즈를 가진 달콤한 과일인데, 사실 그 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매를 열리게 만드는 씨앗이 5개나 존재한다.

 아마 그들은 인간이라는 꿀벌과 공생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을 것이고, 인간이 원하는 색과 식감, 맛을 만들어 냄으로서 성공적으로 지구상에 번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식물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녹아들었다.

​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에 의존함으로써 경제의 변화무쌍함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무쌍함에도 더할 나위 없이 취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주는 사건은 1845년 늦여름에 갑자기 터졌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배를 통해 감자 잎마름병이 유럽에 상륙했고, 이 무시무시한 병원균의 포자는 발마을 타고 몇 주 사이에 유럽 대륙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감자와 감자를 주식으로 삼던 사람들에게 종말을 알렸다. (322쪽.)

 감자가 당시 잎마름병을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들이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는 야생 감자에게서 그 병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데스 산맥은 바로 감자의 다양성 중심지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야생 식물의 터전인 야생지가 점점 줄어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야생 감자와 야생 사과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낸다거나 이미 사라져버린 유전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116쪽.)​

​ 하지만 그들은 과연 과거의 그 선택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을까. 그들은 분명 인간의 마음에 드는 유전자를 발현시킴으로써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번성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의 유전적 다양성까지 고려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 이런 인간의 탐욕은 그들의 계산에 없었으리라. 인간에게 선택받은 식물들의 유전자는 때때로 그들의 야생에서의 생존에 방해가 되었으며, 단일 재배로 인해, 갑작스럽게 몰살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달걀 하나를 사먹기에도 손이 덜덜 떨리는(?) 상황을 겪고 있다. 양계장에서의 독감의 확산에 대해서 주로 언급되는 원인으로, 좁은 공간에서 밀집해서 키우는 현실이 소개되고 있는데, 물론 그게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언젠가 내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또 한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유전적 단일화'. 인간에게 유익하게 품종개량된 그들은 대체로 유전자가 거의 동일한 지경이라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것이 사살이라면 밀집되지 않는 환경이라고 해도, 그들이 인간의 길들이 안에 머무는 한, 집단폐사의 상황을 피해갈 수느 없을지도 모른다. ​

 자연의 변화무쌍함. 과연 우리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자연의 탓'으로 돌려도 괜찮은 걸까? 과거에는 그것들이 오롯히 자연의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현재에 닥친 수많은 재해들은, 결국은 우리가 긴 시간동안 축척해온 '안일함'이 터져나온 '인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이 모든 재앙들을 '자연재해'가 아닌 '인해'의 입장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그런데 이런 자연 재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덮친 폭풍은 자기 분수를 모른 채 오만하게 구는 인간에게 자연이 무한한 위력을 과시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구 온난화 때문에 대기가 불안정해져서 나타난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사실 인간이 가지런하게 줄을 맞추어 심은 나무들은 폭풍이 뿌리를 뽑고 흔들 때, 이 폭풍 역시 인간 지배력을 의미하는 그 나무들의 질서만큼이나 인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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