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집 오,사랑 [+친필사인시디/+통에넣은포스터증정]
Kakao Entertainment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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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루시드 폴의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바짝 곤두서있던 내 정신이 스르르, 무장해제 됨을 느꼈다. 그만큼 그의 음악은 편안했다. 마치 한없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가락을 붙인 것처럼, 나른했고 또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치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것 같은 익숙함과 왠지 모를 아련한 향수마저 주었다.

이렇게나 서정적일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한 곡 한 곡이 마치 한 편의 시화처럼 서정적으로 흘러서, 이런 음악은 꼭 CD로 들어야 한다, 라는 욕망을 아주 강렬히 자극시켰고 결국 앨범의 전곡을 들어보지 않은 채로 음반을 구매했다. 보통 전곡을 들어보고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음반을 구매하곤 했던 내게는 충동구매 아닌 충동구매였다. 그래서 손에 들어오게 된, 바로 이 음반. 루시드 폴의 2집, ‘오, 사랑’.

당연히 이 음반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CD에 걸어놓고 그야말로 무한 반복. 조악한 mp3의 음질에 댈 게 아닌, 아름답고도 따스하게 퍼지는 멜로디. 음반은 전체적으로 버릴 곡 하나 없이, 물 흐르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진다. 아니, 한곡씩 따로따로 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곡이 다 너무 비슷해서 뭐가 어떤 노랜지 구분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도 하나하나의 특별한 매력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신기한 구성. 곡의 배열을 굉장히 잘 한 것 같다.

나는 평소 멜로디를 훨씬 중시하고 가사는 뒷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음반을 받고 가사집을 보면서 그게 얼마나 바보짓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루시드 폴의 음악은 멜로디가 좋은 것은 물론이고, 가사마저도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가사집을 열심히 보면서 그 서정적인 표현들에 새삼 놀랐다. 그러면서,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에 새삼스레 감사함을 느꼈다. 이런 음악에 이런 가사를, 모국어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에. 행복감으로 충만해짐을 느꼈다.

모든 곡이 명곡이지만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곡들은, ‘사람들은 즐겁다’와 ‘삼청동’. ‘사람들은 즐겁다’는 제목만 봤을 땐 굉장히 밝기만 한 곡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랑의 아픔, 쓸쓸함. 그 아릿한 감정들을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쓸쓸한 보컬에 담아낸 이 곡의 가사는 그야말로 압권. 사랑에 아픈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즐겁다... 는 내용. 가사며 피아노 선율, 보컬까지 한 치의 어색함 없이 너무나도 잘 맞물려, 그 쓸쓸함을 너무나 잘 표현해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곡. 그리고 ‘삼청동’은 제목이 다소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곡과 너무 잘 어울리는데, 그렇다고 또 곡이 촌스럽다는 건 아니고, 굉장히 아련한 향수를 지닌 곡이라는 뜻이다. 따스하게 흐르는 기타 선율과, 잔잔한 보컬. 이 곡 역시 가사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답고, 그런데 또 편안하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서 귓가를 떠나지 않는 노래. 아니, 귓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은 노래, 라고 말한다면 설명이 될까. 루시드 폴의 음악은 늦게 접했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내 감성을 매료시켰다. 슬프도록 사랑스러운, 혹은 슬프지만 사랑스러운 음악이다.

겨울이 오는 쓸쓸한 길목에서, 바람결 같은 그의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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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list 2007-11-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시드 폴에 흠뻑 빠져있던 때 썼던 리뷰, 여기로 데려왔음. 수정을 볼까 했으나 손대면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아 포기... 지금도 좋아하지만, 나 저 땐 루시드 폴 정말 사랑했었구나. TㅁT!
 
루시드 폴 - 3집 국경의 밤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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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시드 폴의 음악을 좋아한다. 특히 차갑고 눈부신 가을과 겨울에 듣는 루시드 폴을, 정말 좋아한다. 하긴, 이름부터가 '찬란한 가을' 아닌가. 그 자신 가을을 좋아해서 저런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하니 그의 음악이 시린 계절에 잘 어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그의 음악은 특별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외로움과 쓸쓸함, 숙명적으로 느껴지는 고독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적인 느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따스하다. 마치 두터운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햇빛은 늘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처럼, 외로움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지만 희망은 상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그의 모든 음악에서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만 같다.

루시드 폴에 대한 전반적 견해 혹은 예찬은 이쯤으로 그만 하고, 이번 음반에 대해 말해보자면. 솔직히 기대보다는 별로다. 2집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3집에 대한 기대는 당연히 컸었고, 기대가 너무나 컸으므로 그만큼에는 못 미친다는 뜻이다. 사실 난 별 다섯개 만점에 여섯개로도 모자랄 만한 음반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마 그건 심각한 욕심이었겠지? 객관적으로 별 네개 쯤의 수준 높은 음반이 나왔으나 대만족! 이 안 되는 것은 이게 루시드 폴의 음반이기 때문.

처음 들었을 때 가장 좋았던 노래는 '사람이었네'.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루시드 폴 답다. '무지개'는 다소 밝은 톤의 곡인데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좋고. 그런데 처음 들었을 때 왠지 성시경 생각이 났다. 미안하지만 왠지 성시경에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성시경이 이런 분위기의 곡들을 많이 불렀어서 그런가, 어쨌든 나중에 리메이크 해도 좋지 않을까- 라는 혼자만의 생각.

'국경의 밤'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feat. 김정범'이란 말에 보컬 피쳐링인가 하고 기대에 부풀었었는데 아니었다. 보컬 피쳐링이었어도 잘 어울렸을 텐데. 그리고 이적이 부른 '가을 인사'는 생각보다 좋았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만큼 부드럽고 잔잔한 보컬로 곡을 소화해낸 이적에 대한 놀라움도 컸고. 적군, 이젠 빼도박도 못하게 나이들어버렸구나... 이런 원숙함이라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와 '당신 얼굴, 당신 얼굴'은 이미 라이브 음반에서 들었던 곡들이라 감동이 반감된 측면이 없지 않다. 전자는 원체 곡이 좋아서 김연우 보컬 버전(이것도 굉장히 좋다)부터 좋아했었고, 후자는 라이브 버전이 미묘하게 더 좋다. 루시드 폴 곡 치고는 굉장히 가라앉은, 햇살의 농도가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곡이라서, 녹음 버전의 절제보다는 라이브 버전의 약간 고양된 감정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이번 음반은 전작들보다 사랑 노래가 적다. 솔직히 그 점이 나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은 부분이 크다. 그의 시적인 사랑 노래 가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번 음반은 남녀간의 사랑보단 친구들과의 우정, 가족간의 정, 혹은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번 음반을 듣노라면 (사랑 노래가 적어서 드는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 사람, 정말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싶어진다. 왠지, 그럴 것만 같고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 사람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루시드 폴을 좋아했었는데, 이번 3집이 지금 가요부문 판매량 1위라니. 내가 다 감회가 새롭다. 역시 진실된 음악은 통하는 건가, 싶어진다. 그 동안의 조용한 노력들이 비로소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아서 왠지 기쁜 마음도 든다.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

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루시드 폴을 한국의 Damien Rice라고 하는 게 싫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둘이 거의 전혀라고 해도 될 만큼 다른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이 위에서도 얘기했듯 외로움을 따스하게 감싸는 음악을 한다면, Damien Rice는 정말 처절한 고독과 우울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성향이 정말이지 너무나 다른데 왜 그런 수식어를 굳이 쓰는지 모르겠다. 둘 다 훌륭한 싱어송라이터고 둘 다 좋아하지만, 저런 식의 표현은 싫다. 무엇보다도 내가 본인이라면 더 싫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니 무슨 전설적 아티스트도 아니고 동시대에 활동하는 다른 나라 가수의 한국 버전이라니, 정말 별로다.

어쨌거나... 아주 멀리 기다릴 것도 없이 12월쯤 나와주신다는 토이 6집의 그의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이번 겨울은 그의 노래가 있어 계속 행복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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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24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가을은 거의 루시드폴 아저씨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저도 오! 사랑 앨범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음반은 저에게 다른 의미로 '감동'이었어요

duelist 2007-11-2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사랑' 앨범 사랑합니다... 어떤 다른 의미로 감동이실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사실 저에게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곡들이 많이 들어있는 음반입니다.. 특히 '오,사랑' 이랑 '삼청동'... 어쨌거나 저는 토이 6집의 '투명인간' 기대중이어요. :)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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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2005년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었던 '몽고반점'을 읽은 이후로 2007년 11월 현재까지, 근 3년이 되어가는 시간동안 나는 무던히도 기다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요란한 광고 따윈 없이 (내가 보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 조용히 나와버린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어찌나 반가웠던지. 맹세코 단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집어들었다. 이렇게나 반갑게 책을 집어든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이상 문학상과의 만남, 그것은 내 인생의 문학적 측면에 있어서 실로 터닝 포인트라 할 만한 부분이었다. 한국 현대 문학은 고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내가, 그 선입견에서 탈피하여 한국 문학의 매력에 흠뻑 젖어버리게 한 계기가 되었으니. 내가 처음으로 접한 것은 권지예 작가의 '뱀장어 스튜'가 대상으로 수록되었던 2002년의 이상 문학상 작품집이었다. 마치 고등학교 문학 참고 서적과도 같이 투박한,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표지를 보고 내가 어떻게 그 책을 읽을 결심을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어쨌거나 별 기대도 없이 읽었던 그 소설은, 그러나 별 기대가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이유도 없이 갖고 있었던 선입견을 무참히 깨버린 신선함, 도발, 충격, 그리고 아름다움. 그때의 그 놀라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쨌든 그 이후 나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중심으로 한국 문학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집을 읽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작가를 골라 그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는 방식으로. 그 후 해마다 출간되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챙겨보았다. 작품집에 실린 소설 중 반쯤은 좋았고, 반쯤은 별로였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2005년, 나는 한강의 '몽고반점'을 만나게 된다.

'몽고반점'을 읽고 느꼈던 전율, 그것은 굉장했다. 굉장했다, 라는 표현이 심심하게 느껴질 만큼, 거대했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뱀장어 스튜를 접했을 때보다도 더욱 강렬한. 나는 매료되었다. 그 생경하고 아름다운 카리스마에. 소설을 읽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자선 대표작으로 실린 '아기 부처'를 읽는 것을 미뤘던 것도 기억난다. 몽고반점을 읽으면서 이미 진이 빠진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이 작가의 작품을 아껴서 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우스운 비유를 들자면, 맛있는 음식을 아껴 두었다 먹고 싶어하는 심리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 내가, 이 소설이 하나의 단편이 아닌 3편으로 구성된 연작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으며 목말랐겠는가 말이다. 1편 격인 '채식주의자'는 아직 책으로 발간되지 않았었고 (아마 잡지에 실렸었을 테지만 찾지 못했다) 3편 격인 '나무 불꽃'은 아직 씌어지지도 않았었으므로 당연히 읽을 수 없었기에, 그 때부터 나는 언젠가 이 연작이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여 나오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대는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3개의 단편은 각기 다른 서술자의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그 한가운데 놓여있는 주인공은 단연 '영혜', 그녀이다. 세 단편의 제목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은 전부 영혜라는 인물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녀는 (소소한 몇 가지 특징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으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기원한 악몽을 꾸기 시작하면서 고기를 먹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녀의 육식에 대한 거부는 거의 병적으로 악화되어 결국 정신적 이상을 수반하고, 심지어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 남편에게 이혼당한 그녀는 여전히 채식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하고 조용한 생활을 이어간다 (물론 다소 이상한 징후들이 눈에 띄지만). 그러나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가 그녀에게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연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형부는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몽고반점과 관련된 비디오 아트를 작업해가며, 처제(그녀)에 대한 욕망이 커져나가는 것에 고뇌한다. 온 몸에 꽃을 그린 채로 어두운 욕망은 결국 현실이 되지만, 결국 그 절정을 목격한 아내(그녀의 언니)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후, 그녀의 채식은 식물에의 열망으로 발전하고, 그녀는 나무가 되길 갈망하며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그녀의 언니는 이혼 후, 가족에게서마저 외면당한 그녀를 돌보며 끔찍한 인내로 생을 견뎌나간다. 여기까지가 연작의 주요 내용이다.

작가 한강은 3편의 연작 단편을 통해 너무도 분명하게 '식물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작가도 밝혔듯 전작 '내 여자의 열매'에서 보여준 식물 지향을 변주한 것이다. 그러나 '내 여자의 열매'에서 보이는 모호함과 비현실적 느낌, 인과 관계의 결여, 그로 인한 다소의 그로테스크함과는 달리 '채식주의자' 연작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어느 날 갑자기 몸이 푸르게 변하며 식물이 된다는 설정(내 여자의 열매)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묵직하고 구체적이며 강렬하다. 동물의 폭력성에 대한 환멸, 그로 인한 식물에의 지향. 그러한 전반적인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세 개의 시선. 그리고 이 시대의, 혹은 동물의 근원적 폭력성에 반대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낮은 목소리. 그것들은 나에게 끊임없는 물음표의 연속으로 다가왔다. 명확한 부분에서부터, 명확하지 않은 부분에까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휘몰아치듯 읽고 나자 한동안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 보다도 더욱 길고 깊은 정지상태였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그러나 기분 좋은 공격이었다. 요 근래 나를 이렇게나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던가?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반가운 마음이 드는건지도 모르겠다.

작가 한강의 이 작품집은 그야말로 폭풍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지루한 일상 속에 안일하게 머물러 있는 당신을 깊이 생각하게, 그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자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볍게만 흘러가는 추세에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진지함으로 작품을 써나가시는 작가님에게, 힘내시라며,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다는 허울 좋은 포장을 씌운, 그러나 본질은 명백히 부담인 응원을 아낌없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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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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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일이 있었다. 아주 먼 곳이었다. 남한은 통째로 들어갈 수도 있고 북한까지 합하면 조금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큰 호수가 있는 곳으로, 나는 가고 있었다. 계절답지 않게 아주 뜨거운, 한국에 비한다면 더더욱 뜨거운 태양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진 호수는, 호수라기보단 바다 같았다. 멀리 보이는 것은 건너편의 호숫가가 아닌 끝없는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풍경이었고, 살찐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거나 걸어다녔으며, 심지어 소금기를 동반한 짭짤한 바람까지 불었다. 다양한 이국의 언어들이 떠들어지고 있는 주변, 뜨거운 태양, 거대한 호수, 그리고 그 가운데의 나. 가만히 서있던 순간 그런데 왠지 모르게, '멀리 왔는데도 변한 게 없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자 우습게도, 웃음이 났다. 멀리 왔는데도 변한 게 없다는 외침을 줄곧 드러내고 때론 숨기는, 한 때 날 매료했고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생각났던 거다.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해 보일까봐 손으로 입가를 지워내듯 문질렀다. 멀리 왔는데도 변한 게 없구나, 라는 감상은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바삭거렸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소설책을 집어들어 읽은 것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인생은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므로, 그렇게 극적인 진행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짧았던 부재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바쁜 일상으로의 복귀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비로소 뭔가 여유를 부릴 틈이 났다. 책을 찾아 들고-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책상 옆 책꽂이에 얌전히 꽂혀 있었으니까-, 읽었다. 한동안 머릿속을 부유하던 소설의 편린들이 눈 앞에 문자화되어 놓이자 일단 마음이 편해졌달까. 기분 좋게 소설에 몰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이 도발적인 제목의 소설은, 처음 세상에 나왔던 십여년 전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꽤나 도발적이고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물론, 매혹적이다. 지금 보면 다소 치기 어린 감이 없지 않지만, 그것 또한 흥미로운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내용은 간단하다. 자살 안내인인 '나'를 주축으로, '나'의 고객이었던 두 여자, '유디트'와 '미미'의 이야기를 각각 기술한 것이다. 물론 그 앞부분엔 일종의 프롤로그가, 중간에는 '나'의 일종의 여행담이, 마지막에는 일종의 에필로그가 있는 전형적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장을 '죽음'이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무게와 가치를 갖는 죽음의 방법은 자살 뿐이다. 자살 안내인인 '나'는 압축이라는 은유로 자살의 미학, 혹은 가치를 역설한다. 그런 부분에서 이 소설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과는 별개로 일각에선 혹독한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전부 우스운 것이다. 이 작품은 이론을 체계화시켜놓은 논문이 아니라 다만 한 소설가의 관점에 의한 픽션일진대, 왜 그에 굳이 시비를 가리려 드는가 싶다.

뭐 어쨌거나, 나는 이 리뷰에서 이 소설의 내용과 문장들을 낱낱이 파헤치지는 않겠다. 이것은 다만 리뷰일 뿐 서평이 아니며,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그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많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영화에나 책에나 스포일러가 가장 큰 적 아닌가. 게다가 작품을 두고 감히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혹시나 이 소설을 읽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면, 아주 친절하게도 책에 꽤나 상세한 서평이 함께 실려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리뷰를 쓰는 것은, 이 소설이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다소 건방진 관점을 대놓고 표현함으로써 몇몇 사람들의 반감과 빈축을 샀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대담하거나 은밀하게, 그러나 생각보다 빈번하게. 그리고 우습게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살아 있는 자만이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살아있는 자만의 권리다. 누구보다도 생생히 살아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오만한 권리. 그러니 살아 있는 당신들은 그 살아있음을 감사하든 저주하든 간에, 권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마음껏 떠들고 적당히 침묵하길 바란다. 물론 관건은 적당량을 유지하는 침묵이겠지. 매사 적당한 것 만큼 어려운 일도 드무니까.

그래서 내가 이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 역시, 읽든지 말든지 상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찍어낸 출판사 사장도 아니고 작가는 더더욱 아니므로 중대한 상관이 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예술이란 수용자에 의해 언제나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책에 별을 네개나 줬지만, 어떤 사람은 다섯개를 줄 수도 있고 혹은 그냥 그런 세개를 줄 수도 있으며, 어쩌면 별을 하나도 주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바로, 당신에게.

늘 현명한 침묵을 지키고 싶지만 왜 나는 이렇게나 말이 많은지. 언젠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붙잡혀 숨막히게 좁은 방에 15년간 갇히게 되더라도 할 말이 없다. 다만 식단을 좀 다채롭게 해준다면 감사하겠다, 는 정도의 각오를 하고 있다. 어쨌거나, 왜 나를 이렇게까지 수다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일까. 문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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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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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라. 독특하고, 뜬금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깔끔하고 어찌보면 밋밋하지만 왠지 들춰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산뜻한 표지의 이 책. 그런데, 저자는 에쿠니 가오리.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 왠지 마음이 가는 책 디자인이었다는 말(난 디자인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읽기는 읽었다. 결국은 디자인의 승리였던 걸까.
에세이집이다. 그것도 ''결혼''에 관한 에세이집, 그것도 일본 작가. 다른 사람들에겐 모르겠지만 일단 내겐 그다지 매력적인 조건들이 아니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몇 권 읽은 적이 있다. ''낙하하는 저녁''은 좀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은 대부분 읽다 말았다. 작가 특유의 차갑고도 섬세하며 시린, 그 문체가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고 그런 담담한 연애(라고 단정지을 순 없을 수도...)소설, 그 가벼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에세이집이 괜찮게 다가왔다.
결혼과 가정을 소재로 하는 대다수의 글처럼 진부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도, 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좀 의외였다. 너무 쿨했다. 읽으면서, 도대체 이게 결혼 이야긴지, 아니면 동거 이야긴지가 헷갈릴 지경으로. 그러다가 그녀의 소설들을 생각했고, 그러자 그녀 소설의 전반적 정서가 확 정리되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사실 에세이집의 묘미가 그런 데 있기도 하다. 소설들을 읽으면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감정 같은 것들이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것, 그럴 때의 명쾌함.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좀 신기하다는 생각도 함께.
에쿠니 가오리는 에세이들에서, 너무나 서슴없이 이혼 후의 상황을 가정해보기도 하고, 남편을 타인으로 규정해버리기도 한다. 물론 ''아, 내가 결혼이란 걸 왜 했던가. 결혼은 정말 끔찍한 것이며, 도대체 내가 왜 이딴 것을 했는지 모르겠다.''이런 식의 탄식은 아니다. 정말로 그녀답게, 너무나 쿨하게 그저 생각해보는 것이다. 냉철하고도 철저한 개인주의적 정서가 어쩐지 친밀하기도 낯설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이 글을 과연 (그녀의) 남편도 봤을까(, 그러고도 계속 사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푹 웃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같이 살지! 그게 서로 이해가 가능한 거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건 이번 책을 읽고, ''에쿠니 가오리는 에세이가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 특유의 가벼움, 건조함, 냉철함 같은 것이 에세이라는 장르에서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소설은 깊을수록 좋고, 에세이는 가벼운 게 좋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늘어진 기분을 가볍고 산뜻하게 적시고 싶을 때, 이 책을 꺼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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