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은 미지의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편집증적 망상이 아닐까. 다양한 프레임으로 읽어낼 수 있지만, 오랫동안 남는 것은 어둠의 갑갑함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묘사와 그것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로의 서술. 어둠 같은 문장들 사이에서 빛도 없이 헤매다 빠져나온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8. 12.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의 의무론 부분을 다 읽음. 칸트의 의무론에 대해선 중학교 시절 배웠고 그때는 너무 딱딱하고 예외적인 상황에 적용이 어렵다 정도로만 기억했었는데, 실제 저자가 드는 예시나 트롤리 딜레마에 적용해보니 더 갑갑한 이론이었다. 굿 플레이스의 치디를 보니 더더욱. 굿 플레이스는 시즌 3를 순항 중.




24. 8. 16.















조금씩 어둠의 심장읽기. 약속 가는 길 지하철에서 보다가 카페에서 시간 기다리며 본문 완독. 등장하기 전까지의 커츠는 신비의 베일에 싸인 주술사와 같은 이미지였다면, 등장한 이후의 커츠는 광기 그 자체인 모습으로 읽힌다. 신비로움과 광기는 멀어 보이지만 결국 통한다는 느낌처럼.


24. 8. 18.

굿 플레이스시즌 4 피날레를 보았고, 이후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처음엔 자신들이 굿 플레이스에 가기 위해 좌충우돌했던 네 인물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마무리가 있었나 싶다. 사후 세계의 모습,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지에 대한 질문,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 등의 문제를 가볍고 코믹하게 풀어내지만, 마지막까지 보고 남는 것은 '그래서 지금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 무엇이 '더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 같기도 하고,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은 그 답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take it sl'eazy." 살면서 사소한 실수들을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적이고 실수들을 통해 성장하는 것.

https://blog.naver.com/iio7yun/222242612309 

(└굿 플레이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어둠의 심장의 해설 부분을 다 읽음. 책을 이번에 처음으로 읽으면서 내내 느낀 것은 미지(未知)의 숲속을 대변하는 어둠의 이미지가 주는 갑갑함, 그 어둠을 더욱 갑갑하게 만드는 말로의 서술 방식이다. 황유원 번역가의 해설과 정희진 서평가의 발문이 작품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희진 서평가는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지면의 한계로 글이 갑자기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8. 5.















집에서 읽던 속죄를 지하철에서 마저 읽는다. 2부는 장의 구분 없이 로비의 시점으로 쭉 전개된다. 아수라장 같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전장에서, 브라이어니의 속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스타벅스에서 본문을 완독했다. 말미에 가서 만난 놀라운 반전. 그리고 그 다음에 만나는 또다른 반전. 이 상황에서 브라이어니의 속죄는 진정한 속죄일까? 아니면 자기 위안을 위한 것일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수많은 물음표가 생기고, 소설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빛과 돌과 물에 대한 장황한 묘사, 세 명의 관점으로 나뉜 서술방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비겁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방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 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길 원치 않았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458)


24. 8. 6.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쇼펜하우어 부분을 읽었고,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을 읽기 시작. 작가가 드라마 굿 플레이스의 작가인 것을 알고 시리즈가 궁금해졌다. 웃기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머리말부터 유머가 넘친다.




└젖기 전에 피자를 먹으면 되잖아!


24. 8. 7.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에피쿠로스 챕터 읽기. 에피쿠로스의 쾌락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24. 8. 8.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시몬 베유 챕터를 읽음. '관심'이라는 키워드가 잘 들어 오지 않는다. 생각을 유보하고 일단 기다리는 것? 조급함에 판단을 내리지 말고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게 내가 이해한 정도다.



24. 8. 9.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간디 챕터를 읽음.



속죄의 밑줄 부분을 정리함. 리뷰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아직까진 모르겠다. 오해와 혼동, 속죄의 진정성과 완성의 여부, 전쟁, 현실에서 문학의 역할 등등.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의 저자가 제작한 굿 플레이스를 계속 보고 있다. 미국식 유머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지만 재치있는 설정과 캐릭터들, 그리고 재미 때문에 계속 보게 된다. 윤리적인 문제를 어떻게 이리도 가볍게 풀어내는지도 감탄스러운 부분. 짧게 요약하면, 살면서 나쁜 행동만 하고 살던 엘리너(크리스틴 벨)가 위쪽(?)의 실수로 착한 사람만 죽어서 간다는 '굿 플레이스'에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나는 인물들과 함께 벌이는 별별 소동이 주된 내용.


 

출처: IMDb


24. 8. 11.

굿 플레이스시즌 2까지 시청을 마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7. 29.














『여름의 끝』 계속 읽기. 엘리와 플로리언의 관계를 보며 안타까움과 쓸쓸함을 느낀다. 처음부터 기울어진 관계는 어떻게 끝날까. 작가는 이 안타까운 관계와 인물들의 감정을 휘몰아치듯 쓰지 않고 담담하게, 그래서 더 쓸쓸하게 쓴다. 지하철역에 내려서 약속을 기다리며 완독. 끝이 이렇게 될 거라곤 짐작했지만 끝을 보니 더욱 쓸쓸한 마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려는 그 풍경에서 한국 제목이 더욱 실감났다.



24. 7. 30.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처리하러 방문. 알라딘의 매입가와 판매가는 항상 불만족스럽지만 책을 둘 공간을 마련하려면 불가피한 과정이다. 다 처리한 뒤 돌아보다가 책을 또 구입하고 마는데...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와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알라딘 옆 스벅은 사람이 차 있어서 다른 카페로 건너왔다. 『에로스의 종말』 마저 읽기. 한병철의 책은 항상 부정성의 소멸과 긍정성의 과잉, 성과사회, 자기착취 등의 개념들의 자장에서 맴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기억할 부분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헤겔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 맺는 능력), 사랑과 죽음의 친연성, 자본주의와 포르노그라피(전시화와 비속화, 그리고 아감벤 까기) 등등... 투비에 장별로 난잡하게 정리를 하고 있는데(기억하기의 일환으로), 저번에 쓰다가 두 번이나 날려먹은 적이 있어 조심스럽다.



24. 7. 31.

새벽 수영을 처음 다녀온 날(발차기만 한 시간 동안 했던 날). 잠깐 자고 일어나서 『에로스의 종말』 마저 읽기. 사유의 중요성(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심리정치와 닮았다. 플라톤에 대한 해석은 새롭고 도전적. 완독하고 투비에 정리도 마침.
















『속죄』 읽기 시작. 가계도를 만들면서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한 집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24. 8. 1.
















성수 가는 지하철에서 이북 읽기. 크레마S를 오래 전에 생일 선물로 받았는데 익숙해지지 않아 이북도 꽤나 구입해놓고 서랍에 둔 지 오래되었다(50년 대여 이벤트가 뜰 때마다 대여도 해 놓았는데 말이지). 이북에 친숙해질 겸, 『속죄』는 너무 무겁기도 하고 해서 챙겨오는 길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읽기. 가볍게 주제를 풀어가는 저자의 글솜씨가 익살스러워 웃음짓게 된다.

















성수를 돌아보다가 너무 더워져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와 마저 읽는다. 같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나도 읽었는데 왜 난 저런 구절을 본 것 같지 않은지?




24. 8. 2.

늦은 점심을 먹고 필름도 맡기고 필름카메라 수리도 맡기러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이북으로 마저 책 읽기.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내가 아는 철학교양서라기보다 저자의 철학자 (심연) 탐방기에 가깝다. 각각의 철학자에 대한 주제를 잡고 이를 이정표 삼아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는 방식. 소크라테스는 대화였고, 루소는 산책이었고, 소로는 (어슬렁거리며) 보기였다.


필름카메라를 맡기고 문득 이리카페를 오랜만에 다시 가보자는 생각에 다시 지하철을 탄다. 아주 운 좋게 내가 들어올 때 나간 일행이 있어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더위를 식힌다. 그리고 『속죄』 읽기.




24. 8. 3.














블루도어북스 방문. 들어가자마자 아늑한 공간 인테리어에 반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책들과 소품들도 너무 아름답고 읽을 자리들도 아늑하다. 책에 온전히 파묻힐 수 있게 해주는 직원들의 친절함까지. 중간중간 인센스? 디퓨저를 실은 카트를 끌고 한 바퀴를 도신다. 가져간 책 말고 서가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쭉 읽음. 해설 전까지 읽고 시간이 다 되어서 나왔다. 해설을 못 읽은 것은 아쉽지만 이북 어딘가에 전집 해설 모음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24. 8. 4.

집에서 쉬며 『속죄』 1부를 다 읽음. 세실리아와 로비, 브라이어니 사이에서 일어난 사소한 실수와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벌어진 비극. 이렇게 긴 분량으로 켜켜이 쌓아올린 비극의 총성이 이제 울렸으니,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읽을수록 가장 중요한 대목은 수요일에 읽은, 혼동과 오해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덧) 2주차 일기는 아이폰 메모에 적었으나 컴퓨터로 옮길 때 어려움이 있어 이번엔 에버노트로 적어 보았다. 확실히 휴대폰과 컴퓨터를 오갈 때 편리하여 계속 사용할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7. 22.

  병원 가는 지하철, 돌아오는 길 스벅에서 자먀틴의 《우리들 읽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임을 알게 되어 오래전에 산 책인데 아직까진 헉슬리나 오웰의 작품들만큼 집중하게 되진 않는다. 다소 복잡한 설정/용어들과 화자의 장황한 묘사 때문일까?















고대인들은 도둑놈처럼 몰래, 비밀리에 선거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몇몇 사가들은 심지어 그들이 주도면밀하게 변장을 하고 선거의 축제에 나타났다는 주장까지 한다(나는 그 환상적이고 음울한 광경을 상상해 본다. 밤, 광장, 검은 망토를 입고 벽을 따라 살금살금 걷는 인간의 형체들, 바람에 움츠리는 붉은 횃불……). 어째서 그 모든 비밀이 필요했을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껏 풀리지 않았다. 가장 납득할 만한 답변은 선거가 당시에는 일종의 신비스럽고 미신적인, 어쩌면 범죄 의식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숨길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공공연하게, 정직하게, 대낮에 선거를 축하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은혜로운 분>께 투표하는 것을 본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과 <나>는 단일한 <우리〉 아닌가. 고대인들의 비겁하고 도둑놈 같은 <비밀>보다 얼마나 더 고결하고 진실되며 고상한가. 그리고 얼마나 더 합목적적인가. 그리고 만일 그 상례적인 화음에 불가능한 것, 일종의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해도 보안요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대열 속에 숨어 있으므로 걱정할 게 없다. (176쪽)

 

  《에로스의 종말에서 바디우의 서문을 읽다가 바디우의 질문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몇 번을 다시 보았다. 떨어진 독서력의 문제일까, 아니면 책을 다 읽고나면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타자에 대한 소비주의적이고 계약주의적인 관계의 반대편에 올 수 있는 것이 오직 타자에게로 들어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 자아를 파기한다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숭고성뿐일까? 반복적인 개인적 만족감이라는 조악한 긍정성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오직 절대적 부정성뿐일까? 어쨌든 이타적 사랑의 관념, 타자 속에서 소멸하는 자아라는 관념은 길고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다. 십자가의 요한이 쓴 시편들 속에서 열정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신의 신비로운 사랑 같은 것. 하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막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의 둘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건설한다는 전망, 더 이상 나의 것도, 타자의 것도 아닌 세계, 유일한 개별자로서의 "우리 둘"을 경유하여 이루어질 모두를 위한 세 계 기획의 전망이 자기 자신의 길을 열어갈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랑은 잠정적으로만 부정성의 절대적 시련, 즉 타자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이타적 태도일 것이다.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성과 타자성에 관한 모든 가정 속에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극좌주의가 들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충실한 사랑이란 실제로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 것이다. (11~12쪽)

  24. 7. 23.

  1인 미용실을 이용할 때 좋아하지 않는 것은, 디자이너 분과 계속 스몰 토크를 해야 할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다(이용한 지 얼마 되진 않았다. 항상 가던 분이 개인 미용실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오늘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가 디자이너 분이 쉴 때 책을 자주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근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 기억서점과 꿀벌의 예언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웃음》을 마지막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품 읽기를 그만 두었다는 걸 오랜만에 떠올렸고, 최근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 뭐였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할 책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리고 말았다.
















  머리를 자르고 스벅에서 우리들을 마저 다 읽었다. 집에 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의 자먀틴 부분을 읽음. 멋진 신세계보단 1984가 많이 떠올랐고 왜 이렇게 생략이 많고 혼란스러운 서술 방식인지 책을 찾아보니 이해가 조금 되었다.

「당신은 그럼 도대체 어떤 마지막 혁명을 원하는 거죠? 마지막이란 없어요. 혁명이란 무한한 거예요. 마지막 혁명이란 어린아이들을 위한 얘기죠. 아이들은 무한성에 겁을 집어먹죠. 따라서 그 애들이 밤에 편히 자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나 도대체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은혜로운 분〉을 위해서 말해 줘요. 일단 모두가 다 행복해졌는 데 그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만일…… 아니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그러고 나선 어떻게 되죠?」
「우습군요! 완전히 어린애 같은 질문이에요. 아이들에게 무언가 끝까지 다 얘길 해주지요. 그러면 아이들은 꼭 이렇게 묻지요. 그리고 어떻게 됐어? 그래서?」
「아이들은 유일하게 용감한 철학자들이에요. 그리고 용감한 철학자는 반드시 어린이들이고요.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언제나 〈그리고 어떻게 됐어?>가 필요해요.」
「그러고 나서는 끝이에요! 마침표. 전 우주에 균등하게, 도처에 분포되어 있는 것은…….」
「아하! 균등하게, 도처에! 바로 그것이 엔트로피, 심리적 엔트로피예요. 당신은 철학자니까 분명히 아시겠죠. 다양성만이, 체온의 다양성, 열량의 대비만이 생명을 구성한다는 걸요. 만일 우주 도처에 동일하게 차갑거나 동일하게 뜨거운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만 해요. 불과 폭발과 지옥을 위해서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제거할 거예요.」(221~222쪽)
















자먀틴은 톨스토이, 고리키, 체호프 등의 문학을 풍속의 사실주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 현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전위, 왜곡, 굴곡, 비객관성이 내재한 참실재(Realiora)'를 그려 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구호이기도 한데 자먀틴은 이를 수용합니다.
참실재란 비유컨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 곧 평면기하학에서는 평행선이 만날 수 없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서로 만나는 게 가능합니다. 이런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자먀틴의 주장입니다. 비록 비유클리드적 세계가 파열로 인한 상처와 아픔을 동반한다 하더라도요. (69~70쪽)   

  24. 7. 24.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비행기 안에서 여름의 끝 읽기.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뭔가 다들 사연이 있는 것 같은 인물들.














  24. 7. 26.

  제주 책방 투어 중 스콜 같은 비바람을 헤치며 다니다 달책빵에서 책 읽기. 여름의 끝을 계속 읽고 있다. 책방풀씨가 공간은 작았지만 책들의 큐레이션이 내 취향이었고, 책방마고는 아늑한 공간과 책 읽을 수 있는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은 제주시 근처의 책방들을 돌아보았고, 여러 군데롤 둘러보았지만 이후북스가 인상적이었다. 책방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어 들어가 보았던 클래식문구사도. 어쩌다 보니 제주에서 산 책은 모두 아무튼 시리즈다.
















  24. 7. 28.

  집에서 여독을 풀며 짐정리를 하고 여름의 끝을 계속 읽는 중.

여름이라는 계절로 인해 더욱 목가적으로 느껴졌던 우정을 되도록 길게 끌고 싶었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우정의 불가피한 종말이 얼마나 깊은 낙심을 안겨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고,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189~19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