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7. 22.
병원 가는 지하철, 돌아오는 길 스벅에서 자먀틴의 《우리들》 읽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임을 알게 되어 오래전에 산 책인데 아직까진 헉슬리나 오웰의 작품들만큼 집중하게 되진 않는다. 다소 복잡한 설정/용어들과 화자의 장황한 묘사 때문일까?
고대인들은 도둑놈처럼 몰래, 비밀리에 선거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몇몇 사가들은 심지어 그들이 주도면밀하게 변장을 하고 선거의 축제에 나타났다는 주장까지 한다(나는 그 환상적이고 음울한 광경을 상상해 본다. 밤, 광장, 검은 망토를 입고 벽을 따라 살금살금 걷는 인간의 형체들, 바람에 움츠리는 붉은 횃불……). 어째서 그 모든 비밀이 필요했을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껏 풀리지 않았다. 가장 납득할 만한 답변은 선거가 당시에는 일종의 신비스럽고 미신적인, 어쩌면 범죄 의식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숨길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공공연하게, 정직하게, 대낮에 선거를 축하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은혜로운 분>께 투표하는 것을 본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과 <나>는 단일한 <우리〉 아닌가. 고대인들의 비겁하고 도둑놈 같은 <비밀>보다 얼마나 더 고결하고 진실되며 고상한가. 그리고 얼마나 더 합목적적인가. 그리고 만일 그 상례적인 화음에 불가능한 것, 일종의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해도 보안요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대열 속에 숨어 있으므로 걱정할 게 없다. (176쪽)
《에로스의 종말》에서 바디우의 서문을 읽다가 바디우의 질문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몇 번을 다시 보았다. 떨어진 독서력의 문제일까, 아니면 책을 다 읽고나면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타자에 대한 소비주의적이고 계약주의적인 관계의 반대편에 올 수 있는 것이 오직 타자에게로 들어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 자아를 파기한다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숭고성뿐일까? 반복적인 개인적 만족감이라는 조악한 긍정성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오직 절대적 부정성뿐일까? 어쨌든 이타적 사랑의 관념, 타자 속에서 소멸하는 자아라는 관념은 길고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다. 십자가의 요한이 쓴 시편들 속에서 열정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신의 신비로운 사랑 같은 것. 하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막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의 둘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건설한다는 전망, 더 이상 나의 것도, 타자의 것도 아닌 세계, 유일한 개별자로서의 "우리 둘"을 경유하여 이루어질 모두를 위한 세 계 기획의 전망이 자기 자신의 길을 열어갈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랑은 잠정적으로만 부정성의 절대적 시련, 즉 타자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이타적 태도일 것이다.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성과 타자성에 관한 모든 가정 속에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극좌주의가 들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충실한 사랑이란 실제로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 것이다. (11~12쪽)
24. 7. 23.
1인 미용실을 이용할 때 좋아하지 않는 것은, 디자이너 분과 계속 스몰 토크를 해야 할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다(이용한 지 얼마 되진 않았다. 항상 가던 분이 개인 미용실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오늘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가 디자이너 분이 쉴 때 책을 자주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근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 《기억서점》과 《꿀벌의 예언》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웃음》을 마지막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품 읽기를 그만 두었다는 걸 오랜만에 떠올렸고, 최근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 뭐였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할 책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리고 말았다.
머리를 자르고 스벅에서 《우리들》을 마저 다 읽었다. 집에 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의 자먀틴 부분을 읽음. 《멋진 신세계》보단 《1984》가 많이 떠올랐고 왜 이렇게 생략이 많고 혼란스러운 서술 방식인지 책을 찾아보니 이해가 조금 되었다.
「당신은 그럼 도대체 어떤 마지막 혁명을 원하는 거죠? 마지막이란 없어요. 혁명이란 무한한 거예요. 마지막 혁명이란 어린아이들을 위한 얘기죠. 아이들은 무한성에 겁을 집어먹죠. 따라서 그 애들이 밤에 편히 자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나 도대체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은혜로운 분〉을 위해서 말해 줘요. 일단 모두가 다 행복해졌는 데 그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만일…… 아니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그러고 나선 어떻게 되죠?」
「우습군요! 완전히 어린애 같은 질문이에요. 아이들에게 무언가 끝까지 다 얘길 해주지요. 그러면 아이들은 꼭 이렇게 묻지요. 그리고 어떻게 됐어? 그래서?」
「아이들은 유일하게 용감한 철학자들이에요. 그리고 용감한 철학자는 반드시 어린이들이고요.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언제나 〈그리고 어떻게 됐어?>가 필요해요.」
「그러고 나서는 끝이에요! 마침표. 전 우주에 균등하게, 도처에 분포되어 있는 것은…….」
「아하! 균등하게, 도처에! 바로 그것이 엔트로피, 심리적 엔트로피예요. 당신은 철학자니까 분명히 아시겠죠. 다양성만이, 체온의 다양성, 열량의 대비만이 생명을 구성한다는 걸요. 만일 우주 도처에 동일하게 차갑거나 동일하게 뜨거운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만 해요. 불과 폭발과 지옥을 위해서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제거할 거예요.」(221~222쪽)
자먀틴은 톨스토이, 고리키, 체호프 등의 문학을 풍속의 사실주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 현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전위, 왜곡, 굴곡, 비객관성이 내재한 참실재(Realiora)'를 그려 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구호이기도 한데 자먀틴은 이를 수용합니다.
참실재란 비유컨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 곧 평면기하학에서는 평행선이 만날 수 없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서로 만나는 게 가능합니다. 이런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자먀틴의 주장입니다. 비록 비유클리드적 세계가 파열로 인한 상처와 아픔을 동반한다 하더라도요. (69~70쪽)
24. 7. 24.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비행기 안에서 《여름의 끝》 읽기.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뭔가 다들 사연이 있는 것 같은 인물들.
24. 7. 26.
제주 책방 투어 중 스콜 같은 비바람을 헤치며 다니다 달책빵에서 책 읽기. 《여름의 끝》을 계속 읽고 있다. 책방풀씨가 공간은 작았지만 책들의 큐레이션이 내 취향이었고, 책방마고는 아늑한 공간과 책 읽을 수 있는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은 제주시 근처의 책방들을 돌아보았고, 여러 군데롤 둘러보았지만 이후북스가 인상적이었다. 책방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어 들어가 보았던 클래식문구사도. 어쩌다 보니 제주에서 산 책은 모두 아무튼 시리즈다.
24. 7. 28.
집에서 여독을 풀며 짐정리를 하고 《여름의 끝》을 계속 읽는 중.
여름이라는 계절로 인해 더욱 목가적으로 느껴졌던 우정을 되도록 길게 끌고 싶었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우정의 불가피한 종말이 얼마나 깊은 낙심을 안겨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고,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189~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