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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축복받은 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은 미국으로 이주한 인도인들이 주인공이다. 그런 이유로 ‘이민자 소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자신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녀의 작품에서 인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민’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하게 되는 보편적인 조건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축복받은 집』에서는 ‘인도’와 ‘미국’이라는 표피를 뒤집어썼을 뿐. 낯선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상황에서 인간은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음을 추구하고 거기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축복받은 집』은 내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 관계의 맺음과 얽힘, 어긋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읽으면서 ‘첫 작품인데 이렇게까지 잘 쓸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부 사이의 말 못할 관계와 상처를 풀어내는 방식(「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 미국이라는 공간(이 단편집에서 미국은 어떤 국가라기보다 각기 다른 이유로 모인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에서 겪게 되는 아픔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방식(「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 등 다양한 관계에 내재된 상처를 풀어내는 문장의 힘이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차마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밝음과 어둠의 아이러니로 풀어낸 「일시적인 문제」를 맨 처음 읽었을 때, 정말 훌륭하다는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굉장히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스러운 면모가 뒤섞여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의 ‘나’도 그렇고, 「섹시」에 등장하는 ‘로힌’ 역시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이 같으면서도 허를 찌르는 것 같아 성숙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결국 나는 보관함에서 하얗고 네모난 초콜릿을 하나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그러고 나서 전에는 한 적이 없는 행동을 했다. 그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다 녹았다고 생각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씹으면서 피르자다 씨의 가족이 안전하고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전에는 기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적도,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내가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에는 욕실에서 이를 닦는 시늉만 했다. 이를 닦아버리면 내 기도도 씻겨나갈 것만 같았다.
-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61-62쪽)
“그게 무슨 뜻이니?”
“뭐가요?”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
(…)
로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아이가 다시 매트리스를 차려고 애를 쓰자 미랜더가 아이를 꾹 눌렀다. 아이는 침대 위로 벌렁 넘어지더니 등을 반듯이 펴고 누웠다. 아이가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 「섹시」 (172-173쪽)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갖는 힘은 그녀의 섬세한 묘사에서 오기도 하지만, 작품에 내재된 꽉 짜여진 형식에서 오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미는 특히 결말 처리 방식에서 두드러지는데, 어느 부분에서 맺고 끊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는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 갑작스럽게 끝난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단편들의 매력은 군더더기 없이 끝나는 결말을 다 읽은 뒤 잠시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했을 때 물결처럼 다가오는 여운에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몇몇 단편을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린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었으리라(특히 「축복 받은 집」의 결말은 굉장히 카버스럽다).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질병 통역사」도 그렇고, ‘나’가 핼러윈 때 받은 사탕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도 그렇지만, 특히 내가 감탄한 결말은 「섹시」다.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현실에서의 관계란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대부분의 관계는 흔히 우리가 소설에서 보듯이 격정적인 사건이 있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남이 드물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게 되는 것이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이 훌륭하지만, 나에게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주었던 단편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다. 먹고살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연애 없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먼저 이주해 온 ‘나’와 그가 세들어 사는 집의 노파 크로프트 부인 사이의 이야기.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단편은 크로프트 부인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굉장한” 단편이다. 10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노파에게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도 6주라는 시간은 순간과도 같은 것이지만, ‘영원’에 가까운 100년이라는 시간보다 6주라는 ‘순간’이 주는 울림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처럼 이 단편에도 스펙터클한 사건은 없지만, 영원과 순간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는 감동, 특히 마지막 대목이 주는 감동은 대단하다는 말만 하게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족(蛇足)이어서 군더더기 없는 완결성을 추구했던 이전 단편들과 비교되지만, 이 군더더기 때문에 이 단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형식적으로 가장 훌륭한 단편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이 단편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 특히 장편이 읽고 싶어졌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