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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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삼각관계가 있다. '우현-순미-나(기현)', '그-어머니-아버지'. 삼각관계라고 정의할 관계는 아니지만, 이 3자 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어떻게 보면 이들 사이의 이야기를 통속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문장은 단단하고 강렬하다.


두 다리가 잘려나간 형을 사창가에 데려다주는 화자가 있다. 소설은 이 두 형제의 사연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시작한다. 우현과 순미 사이의 사랑과 이를 질투하는 나. 결국 '나'의 치기로 우현은 군대에 끌려가 두 다리를 잃었고, 순미도 잃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가 평생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 민들레 식당에서 처음 만난 둘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았고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가 되어서야 재회한다. 그리고 어머니만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 과거를 알면서도 평생 그녀와 함께한다.


닮지 않은 듯 보이지만 닮은 두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식물, 정확히 말하면 나무에 있다는 점이다. 우현이 산책하며 바라보는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 숲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소나무를 휘감고 있는 때죽나무. "식물과 교감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한다며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의 사랑을 표상하는 야자나무.


그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것이 무슨 상징처럼, 예컨대 두 사람의 숨찬 사랑처럼 여겨지는 것이어서 숙연해졌다고 했다. 사랑을 걸었다고 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그 나무에다 전이시켰던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나무가 정말로 자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니까......" 그 말을 할 때 어머니는 울컥 속에서 치미는 무언 가를 삼켰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지만 보란 듯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한 그루의 야자나무가 그녀의 눈시울을 축축하게 하고 있었다. 상징목이라는 단어가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177쪽)


화자인 '나'는 자신이 형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다시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순미와 다시 만나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 순미의 숨겨진 상처와 대면하게 되고, 동물적인 충동과 욕망 속에 살았던 그는 점점 그들의 식물지향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의 식물은 무동성(無動性)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인 나무, "좌절된 사랑의 화신"으로서의 나무를 말한다. 세상이 사랑을 허락하지 않아 나무가 되었다는 수많은 (우현이 수집한) 신화들 속에서, 그리고 삶에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나무가 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순미의 꿈을 통해 작가의 식물지향성, 아니 나무지향성은 세상의 동물지향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끝에 "기후도 풍토도 다른" 야자나무가 자라는 공간, 남천이 있다. 작가가 지향하는 나무-인간의 모습은 그의 단편 제목처럼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순미와 우현이 마침내 재회했는지는 결말에 나와있지 않다. 그들은 남천에서 재회했을까. 하지만 나는 재회하지 못했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은 결국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모습이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통속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건 작가의 문장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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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6-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어요 ^^

아무 2016-06-13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생의 이면> 읽은 뒤에 반해서 열심히 찾아읽고 있습니다 ㅎㅎ 어느 책을 읽어도 특유의 강철같은 문장이.. 여태껏 왜 몰랐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