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9. 18.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읽기. 책의 마지막에 늙어감과 죽음을 배치하다니 전략적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읽는다. 보부아르와 몽테뉴에 대한 이야기들.
보부아르는 젊었을 때부터 노화에 집착했다. 죽음보다도 노년을 더 두려워했다. 보부아르는 죽음은 “절대적 무"이기에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년은? ”노년은 삶의 패러디"다.
보부아르의 오래된 파트너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노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만 절대로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는 상태, 오직 다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늙어 보이고, 늙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누가 봐도 늙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자신이 늙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노화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기 나이와 충돌하고 12년이 지났을 무렵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순셋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사실이 낯설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모두가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막상 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왜일까? 노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나이가 들면 우리 목소리는 더 듣기 좋아지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더욱 즐거워진다. "지식과 배움에 시간을 쏟는 한가한 노년보다 인생에서 더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 키케로는 결론 내린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개소리. 보부아르는 키케로의 쾌활한 평가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노년을 똑바로 바라보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가 바로 읽기 쉽지 않은 585페이지짜리 책, 《노년》 이다.
보부아르가 보기에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결이었다. 배심원이 없으면 판결도 없다. 무인도의 여성은 생물학적 노쇠를 경험하겠지만 나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우텐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이 이전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패러디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 즉 개인과 집단에, 대의명분과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무가치함 때문에 자신의 일에 스스로를 던지면 된다.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그 자신에 게 달려 있다. 그의 돌은 그 자신의 것이다. ····•돌 속의 작은 원자 하나하나, 어둠이 내린 산의 작은 광물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의 꼭대기로 향하는 그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보부아르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열렬한 영웅주의"라 부른 것을 받아들이고 일 자체가 가진 마법을 즐거움으 로 삼았다. 보부아르는 괴물로 가득한 방 안에 서서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더 많은 괴물을 만들어냈다.
몽테뉴 읽기.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가장 생각 없는 사람도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궁금해한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죽음은 진정한 철학을 가리는 테스트다.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고 겁나는 사건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한다면 철학이 다 무슨 소용인가?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몽테뉴는 자기 철학이 아닌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간청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몽테뉴는 알려준다. 우리는 시도하고 실수하고 시시포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함으로써 스스로를 알 수 있다.
프랑스어로 에세이assay는 '해보다'라는 뜻이다. 에세이는 실험이자 시도다. 몽테뉴가 쓴 에세이들도 하나의 거대한 시도다. 무엇에 대한 시도냐고?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시도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 잘 죽을 수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 삶을 잘 살아낼 수 없었다.
24. 9. 19.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완독. 몽테뉴 관련 장의 나머지 부분과 나가는 말을 읽었다. 몇 군데에 더 밑줄을 쳤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한 생각들. 뻔하다면 뻔한 내용일 수 있지만 삶에 체화시키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니까. 철학자들의 삶과 태도를 이토록 친근하게 풀어낸 것만 해도 성공적.
24. 9. 22.
보난자커피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아무튼, SF게임』 읽기. 책에서 나온 게임들을 잠시 정리해본다. 보더랜드, 폴아웃 뉴베가스, 호라이즌 제로 던, 바이오쇼크, 투 더 문-파인딩 파라다이스-임포스터 팩토리, 디트로이트:비컴 휴먼, 스탠리 패러블, 디스코 엘리시움, 하데스, 스타듀 밸리, 스텔라리스, 스펙 옵스:더 라인, 엑스컴, 매스 이펙트.
성공한 덕후가 자신의 취향을 소개할 때의 들뜬 기분이 글의 저변에 흘러서 즐겁게 읽었다. 오랫동안 폴아웃 시리즈의 팬으로서 거의 모든 결말과 컨텐츠를 속속들이 알아내고자 수십 번 플레이를 했던 입장에서 더더욱. 마냥 가볍게 읽히는 것은 아니고 후반부로 가게 되면 오랜 플레이어로서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딜레마의 문제, 게임 내 다양성 문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