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읽은 만화 한 권이 많은 생각을 낳는다. 강도 8.8의 대지진과 후지산의 분화, 해일로 인해 일본이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진다는 미래이야기다.  

이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읽는 것은 처음인 듯 싶다. 솔직히 제목만으로는 고개가 저어지는데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년이 무척 인상적이라 첫장을 열었다. 소년 켄이치로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발견한 상처입은 강아지 한마리,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소년의 행동에는 절도 감탄사가 터진다.

단지 1권 뿐이라 앞으로의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또 다른 모험과 소년의 활약, 그를 돕는 주변인들이 더 많이 등장하겠지. 분단된 일본을 이끌 대정치가의 탄생과 잠재된 저력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으로 1권은 끝이 났다.

만화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잇권 다툼을 암시한다.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도 구호물자를 싣고 온 강대국의 거친 발자국에 짓밟혔었다. 현실에서 경제강국으로 우뚝 선 일본이 가상의 미래에서 약자로 전락하여 주변국들과 얽히는 과정이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이 작가의 다른 만화도 필히 읽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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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지금 밖에는 엄청 많은 눈이 내린다. 볼 일을 보다 말고 마당으로 나가서 마당과 대문 앞을 쓸고 왔다. 아침 잠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 눈치우기는 불가항력이므로 자기 전에 치우자는 생각이었다. 보다 보다 이렇게 많은 눈은 요 몇 년 동안 처음인 듯 기분이 새롭다. 엎드려 비질을 하는 동안도 한줌은 될 법한 굵은 눈송이가 툭툭 떨어진다. 컴컴한 밤, 골목에 나와 있는 건 혼자다. 눈오는 날 혼자인 것도 그닥 괜찮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새삼스럽게 감상적이 되고 말았다.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도 눈꽃이 그득 피었다. 손가락 마디만큼 아슬아슬하게 쌓인 눈이 금방이라도 우수수 쏟아질 것 같아서 멀찌기 떨어져 섰다. 나무에 눈이 내리며 쌓이는 것이 저렇구나 하면서 열심히 구경하고 섰는데, 그 앞에 밑둥만 남은 목련나무가 괜히 불쌍하다. 옆집에 사는 사람의 이런저런 성화에 올 가을 기어이 베어졌다. 말로는 흉물이라고 무슨 꽃나무가 아름드리 고목이냐고 타박을 주면서 사철 일거리를 만드는 꽃잎이며 낙엽을 구박한 것이 죽도록 후회된다. 하지만 지나치게 커 버린 주택가의 나무는 밀집된 주택가의 이웃에게는 엄청난 민폐였다. 손바닥만한 마당도 시멘트로 발라버리고 풀 한포기 자라는 걸 용인하지 못하는 세상인 탓이다. 조금 멋대로 떨어지고 날라가서 집안을 어지럽힌 들 무슨 큰 해가 된다고 독을 품은 벌레도 아니거니와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데 말이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꽃봉오리가 주렁주렁 눈송이와 쌍벽을 이루었을 터인데 마냥 아쉽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대보름이다. 지금 시골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으리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보여 음식을 만들고 하얀 시루떡을 해서 제를 올리고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놀이는 달빛아래 꽹과리며 징을 울리며 흥겹게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하얀 떡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아래서 동네 어르신들이 하얀 종이를 태우는 것을 구경했다. 마을 앞 공동묘지는 그 밤의 놀이터로 변하여 숨박꼭질이며 미끄럼타기로 웃음꽃을 피웠더랬다. 여자아이들은 나이든 오빠들을 쫓아다니며 쥐불놀이 하는 것을 구경하다 한 번 해 보자고 난리굿을 치곤 했다. 대부분은 겁이 많아서 그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쌩쌩 돌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난히 괄괄한 언니 하나가 성공을 시키면 좋아라 손뼉을 치고 우러러 봤던 유년, 이 밤에 몹시도 그립다.

눈이 쌓이길 기다렸다 대문 앞을 다시 쓸었다. 낼 아침 늦잠을 자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시골에 사시는 엄마가 동생 편에 오곡밥과 나물반찬을 만들어 보내셨다. 자식에게 해 먹이는 낙이 없으면 무슨 재미냐며 전화기 너머로 기침을 하신다. 나는 목이 메어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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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삶 2004-02-0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쌓이는 눈처럼 쌓여 가는 추억이 아름답기만 하죠.
글을 나니 저의 유년의 대보름 밤, 기억이 새로워집니다,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드지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정현종의 시집 '한 꽃송이'에 있는 시다. 오늘, 내 기분이 딱 이 만큼이다.  이 사람의 시에는 유독 슬픈 시가 많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하다싶을 때 읽기에 적당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가 그렇다.

<무슨 슬픔이>

새벽에, /마악 잠 깼을 때, /무슨 슬픔이 퍼져나간다 /퍼지고 또 퍼진다, /생명의 저 맹목성을 적시며 /한없이 퍼져나간다 /메뚜기가 보고 싶다

<어떤 손수건>

슬프구나 /작년에 입었던 옷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손수건

<슬픔>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이열치열 요법이 우울하거나 슬플 때도 효과가 있다. 그래,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라고 결론을 내버리면 만사는 오케이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이지만 짊어지고 살아야할 몫이라면 순응하겠다. 얼키고설킨 인간관계 감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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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책 중 유난히 낡고 바랬음에도 다른 고급 장정의 책에 비해 편애하는  <싸일러스 마아너>의 특이성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웃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가는 괴팍한 성격의 직조공에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 아기 천사가 아장아장 걸어온 것, 이후 독신남 싸일러스 마아너의 삶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미녀와 야수, 꽃이 피지 않는 정원 등의 이야기처럼 절대 다수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순진무구한 여자 혹은 아이로 인해 감화되어 세상밖으로 나온다는 설정만큼 흥미진진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 농촌의 계급사회와 종교적 갈등은 대충 넘기고 오로지 관심은 싸일러스 마아너와 에피 사이에 일어나는 자그마한 에피소드들로 거칠고 무지한 남자의 아이 돌보기라는 관점에서 이 보다 재미난 소설은 없을 듯 싶다. 물론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치면 장황한 묘사와 시대적 배경을 유심히 들여다 볼 테지만 그닥 의식을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내겐 예쁘고 감동적인 작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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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다녀온 뒤 시름시름 앓았다. 버스를 서너번은 갈아타고 비탈진 길을 따라 걸어서 20여분은 걸어야 보이는 고향집은 허물어질 듯 낡았다. 어린 시절 그토록 크고 넓고 깊어보이던 곳이었는데, 성장한 이후 처음으로 객관적인 시각에 비추는 집은 이상한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집 뒤의 대숲은 여전히 푸르고, 숲 옆에 우뚝 솟은 소나무도 근사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저곳에 서 있었을까. 소나무 옆에는 둥근 바위가 버티고 있다. 그 바위 밑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비바람을 가려주고,  마른 짚단을 펼치고 단잠을 자기도 했는데, 이제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은 쓸쓸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풀이 자랄 틈도 없이 어린아이들의 발자국이 찍히던 정겨운 산이었다. 

때로는 추억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만큼 사물은 변하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뒤의 모습이 주는 괴리감은 이렇게 씁쓸한 아픔이 되는 탓이다. 질퍽질퍽 흙길이 회색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자동차들이 빵빵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시골길이 뭐가 어떻다고. 너는 도시로 나가 되는대로 살다가 고향에 돌아와 머무는 짧은 시간도 불만만 쏟아내느냐고 질책하여도 쓸쓸한 건 쓸쓸한 거다.

그럼에도 시골 밤은 여전히 까맣고 별은 총총했다. 너무 많아서 쏟아질 것만 같은데 어찌나 추운지 별빛 근사한 낭만 따위가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문하나만 열면 곧바로 마당으로 향하는 방의 구조는 아무리 두터운 커튼을 달아도 매서운 칼바람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아침, 낮은 벽돌 담 너머로 텅빈 들녘과 산이 무심한 인사를 건네는 건 과거나 현재나 매한가지. 어느 때 건 돌아올 고향, 집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 네 의무임을 잊지말라고 다짐두었다.  망아지처럼 뛰놀던 유년의 기억이 숨쉬는 산과 들, 마당에 구르는 돌맹이, 부서진 장독대를 기억의 창고에 다시금 꾸역꾸역 눌러담았다. 고향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축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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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2-0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향...한폭의 수채화같은 글이네요...추위에 떨던 별빛은 저의 고향인 바다와 똑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