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누구에게 보내는 식의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상의 여지가 없어 보여서다. 그랬는데, 한 권의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제목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보다 적절한 제목이 없어보였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외로움에 사무쳤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대니얼 고틀립이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 애잔한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줍다보면 귀에 익은 평범한 말들이 보석처럼 마음에 와 박힌다. 그 자신이 교통사고로 인한 전신마비 환자이면서도 ‘자폐’ 진단을 받은 아기 샘을 향한 사랑과 연민과 염려에 사무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저절로 눈에 그려진다. 병이나 장애를 보기 전 인간임을, 뇌가 다친 것뿐 영혼이 다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 앞에서 저절로 목이 잠긴다.    

 

샘, 살아가면서 규율, 자제, 목표, 계획, 그리고 포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자제해야 하는 충동, 해서는 안 되는 생각, 억제해야 할 망상에 대해서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동안 지켜봐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네 마음 속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격하게 흔들리다가 어느새 차분해져 있고, 정신없이 날아가다가 일순 느릿느릿 기어가고, 막무가내로 떼쓰다가 온순해진다.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가 동굴처럼 텅 비어 있을 때도 있다. 밝은 빛과 잔잔한 물이 모두 네 마음속에 있다. 다만 그것 이 언제 자리바꿈을 할지 모를 뿐이다. 그게 마음이다.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185쪽)




그게 마음이다, 라는 이 구절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마치 듣기를 기다렸던 말처럼. 내용 중에 ‘파이 이야기’의 호랑이가 등장한다. 오래전, 꽤나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라 기억에 생생한데, 그 비유가 근사했다. 파이의 호랑이가 우리 내면에 있다는 거. 우울증, 강박증, 중독, 공격성, 증오, 시기의 이름으로 나타나지만 함께 거주하며 공존해야 할 존재라는 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전부가 되는 조건이라는 거. 내 안의 그것,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때로는 정체불명의 그것을 ‘호랑이’라고 명명하니 은근히 귀여운 생각조차 든 것이다. 정신관련 분야의 책들을 읽다가 빠지는 함정의 하나는 너무 식상해서, 뻔해서 쉽게 흥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한번은 듣거나 읽거나 아는 글이라고 지레짐작,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기 일쑤다. 무엇보다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들이 대개 아주 쉽다는 거다. 너무 간단해서 허탈할 정도로, 세상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하나도 있을 법하지 않다. 그런데, 그럼에도 자꾸만 손이 가고, 읽어지고, 이렇게 의외의 감동과 위안을 얻는다. 단지 실화여서일까?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누구라도 좋으니, 어쩌면 나는 이 말이 그렇게 간절히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렁설렁 부는 바람, 흩뿌리는 비 때문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이즈음, 사정없이 마음이 요동을 쳐댄다. 십대에 혹은 이십대에 그보다 더 어린 아이 적에 받은 상처들이, 꼭꼭 여며서 마음의 그늘 아래 숨겨둔 반갑지 않은 이방인이 슬그머니 나들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상이나 사람들에 쫓겨 잊고 있었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떠오를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다른 관심사를 찾아서 바쁜 척 하기도 했던 것들이다. 물론 일 년에 한두 번씩 근심이 지나쳐 잠 못 이루는 밤의 시를 읊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낯선 상황이라 갈팡질팡 헤매는 중이다. 이럴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피해자겸 가해자는 가까운 가족들이다. 마치 마음속에 사악한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어 이간질을 하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근데, 웃긴 건 상처를 받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도 괴롭다는 거다. 화가 나서, 분해서, 쏘아 붙이는 말의 독은 내게도 치명적이다. 이런 내게 대니얼 고틀립이 말한다.




샘,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심리분석학자 칼 융은 그 악마를 ‘그림자’라고 불렀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도, 그림자를 떼어낼 수도 없다. 그림자는 나 자신의 일부니까.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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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1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멋진 글이네요.
어서 읽어봐야겠는데... 진심어린 리뷰 참 좋습니다. 우몽님!^^

겨울 2007-09-20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진심이 울컥울컥 솟구치는 책입니다.
어서 읽어보시길. 맘에 쏙드는 구절에 마구 밑줄을 긋게 돼요.

짱꿀라 2007-09-2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괜찮다고 하는 소리가 있던데, 몽상님 리뷰보고 더욱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2007-09-21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낮부터 검은 모기에게 세 방이나 물렸다. 버물리를 바르고 또 발라도 가려움이 가시질 않는다. 독한 놈. 9월 한낮의 극성스런 모기는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약이 올라 있다. 화단의 잡초 틈에 도사리고 있다가 야호! 환호를 지르며 달려들었겠지? 놈을 때려잡아서 내(?) 피를 봤어야 하는데, 원통해.




살금살금. 가을이 걷는다. 바쁠 것 없어. 바쁠 것 없어. 되뇌는 소리. 헐레벌떡 일어섰다가 아, 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온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가을이, 저기, 어디쯤 있다는 거.




지는 꽃이 추하다고 잘라버릴 순 없지. 피는 신비를 고대하고 지켜보았듯이, 말라붙어 떨어지다가 푸른 잎에 걸린 옥잠화의 말로를 끝까지 견디는 것. 그게 도리야.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 난 맨드라미 잎사귀를 봐.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잎만 무성하다고 타박했는데, 어떤 벌레의 맛난 밥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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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9-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온다. --> 사실인가요. 너무 지치게 하는 문구네요.^^

겨울 2007-09-2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한 성격이죠.^^
 

 

젖은 나뭇잎이 시멘트 마당 위에 쩍쩍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아. 지겨워. 라는 말이 눈을 뜨면서 시작해서 눈을 감을 때 까지 터져 나오는데, 그것도 역시 지겨워. 젖은 신문지 조각, 붕 떠버린 벽지, 무덤처럼 쌓아놓은 책 냄새가 바이러스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것만 같아서 불쾌해. 천지사방이 비에 젖어 축축해. 오늘 밤엔 보일러를 돌려야 할 거야. 근데, 몸은, 말라비틀어진 북어처럼 버석거려. 건들면 마른 비듬이 우수수 떨어질듯이, 뼈대 앙상한 손가락 발가락이 무시무시해. 가을이면 앓는 알레르기는 불청객이지만 속수무책이야. 아침마다 눈 뜨기가 괴로워 몸부림을 치지만 이것도 곧 지나가겠지. 이대로, 무거운 눈까풀을 닫아걸고 책상에 엎드려 자버리고 싶은, 밤 같은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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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박군과 상담했던 생활부장(여교사)은 "상담은 30여분 정도 했다. 돈을 벌어 가게를 차리겠다고 하더라. 상담하면서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이야기 했고, 울기도 했다. 하지만 특별히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한 말은 없었다"고 말했다. http://kr.news.yahoo.com/shellview.htm?linkid=33&articleid=2007083111442759124

 

어쨌든 책임을 면해 보려는 안간힘이 보이는데, 입을 열면 열수록 진흙탕에 뒹구는 듯. 어려운 가정 형편을 말하며 우는 학생에겐 그 상황 자체가 상처임을 모르나. 평소 모범생일수록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질책이나 충고 한마디가 엄청난 모멸로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구축한 세계가 땅밑으로 꺼지는 듯 싶을 만큼. 학생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에 대해 학교는  전학이니 어쩌니 하면서 융통성 없이 굴며 엉덩이를 때리고 복도에 벌까지 세웠다.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교 2학년생에게. 그의 죽음에 영문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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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앉아 있었다. 머리는 맑았지만 현기증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는 그걸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계절이 다시 바뀌기 전에, 모든 곡식이 비에 깨끗이 쓸려가고 햇볕에 마르고  바람에 씻기겠지. 나의 어머니가 이승을 살고 난 다음, 깨끗이 씻기고 날려가고 풀잎 속으로 빨려 들어갔듯이, 나의 손길이 닿은 곡식은 한 알도 남지 않게 되겠지.

그렇다면 도저히 두고 떠날 수 없는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곳에 나를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나야 하고, 우리들의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집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죽으려고 돌아와야 하는 그런 어린애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어린애일까? 나는 내 어머니의 무릎에,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무릎에, 그렇게 수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이가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죽는 그런 어린애들의 집안 말이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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