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가 다시 기분 좋게 잠이 든 것은 좋았는데, 나갈 시간이 되도록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초겨울의 비 내리는 이런 날에 집을 나서기는 정말 죽도록 싫다. 현관문을 여니 마당 가득 쌓인 나뭇잎, 하늘을 보니 온통 잿빛, 덩달아 아래로 쳐지는 어깨, 우,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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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오고 흐린날은 집에서 꼼짝 안합니다.. 나가야 할 일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밍기적 거려요~

겨울 2004-11-2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날엔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부러워요. 마음속으로 내내 '곰이 되고 싶어요' 한다는...
 
버스데이 걸(1disc) - 디지팩
제프 버터워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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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은행원 존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뒤집는 선택을 하는데, 바로 인터넷으로 아내를 주문하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러시아 여성들이 ‘나를 봐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하고 대금을 지불하면 배달이다. 그러나 웬걸, 공항에서 만난 여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팔등신 미인, 게다가 영어라고는 오로지 예스밖에 모르는 골초다. 예쁜 여자도 좋지만 소통이 불가한 미인은 버겁기만 하고, 결국 러시아로 돌려보낼 결심을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로 담배를 피거나, 뜨개질을 하던 나디아는 돌연 요염한 여우로 돌변 존을 덮친다. 순진남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금발 미녀의 육탄돌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존은 속절없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디아의 생일에 보기에도 수상쩍은 두 명의 러시아 남자가 들이닥친다.  반가워하는 나디아의 열렬한 환영인사로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 놀지만 의혹은 불거지고, 존은 그들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 나디아가 손수 뜬 빨간 스웨터를 입어보며 존은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평온했던 부엌이 돌연 강도와 인질이라는 살벌한 곳으로 바뀐다. 나디아의 목에 들이댄 칼을 보고 냉철한 판단력을 잃어버린 존은 부랴부랴 근무하는 은행으로 달려가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금고열쇠로 거금을 훔쳐 몸값을 지불한다.


영화는 두 남자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다. 두 남자 알렉세이와 유리, 그리고 나디아는 국제적인 결혼사기극을 벌이는 상습범이었던 것이다. 나디아를 향한 진심어린 존의 사랑은 어처구니없는 웃음꺼리가 되고, 은행 강도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굉장히 빠르다. 거기에서 존의 사소한 감정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분노나 후회, 연민, 자괴감은 보는 이의 몫이다. 그리고 거금을 갈취한 사기범들의 희희낙락과 다툼, 불편한 속내가 드러나면서 오히려 천하의 악녀로 찍혔던 나디아에 대한 연민이 치민다.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연인에게 고백하는 순간 연인에게 차인다. 존과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엔 원점이다.


이 정도가 되면 흔히 생각하기를 뭔가 거한 복수극이 진행되겠지 하겠지만 천만에다. 어쨌거나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존은 나디아를 용서하고 러시아행 비행기를 태우기로 하는데, 영화는 존의 눈물겨운 희생을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어찌해서 은행에서 훔친 거금을 되찾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나란히 오르는 결말이니까.


톰 크루즈와의 결별 이후, 니콜 키드만의 행보는 눈부시다. 과연 이 영화에서 니콜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뱅상 카셀, 마티유 카소비츠의 이력도 화려하다면 화려하지만 러시아인 건달 역은 누가 했어도 그만큼은 했을 것이다. 그녀의 변화 중에는 작품을 고르는 대단한 안목도 있다. 최근의 영화들 거의는 그녀여서 대단했다. 전남편의 등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여배우, 아직 보지 못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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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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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굳이 에세이스트가 아니더라도 이런 글 한 권 정도는 써보고 싶다는 바램. 황인숙의 산문을 읽은 후 든  생각이다. 어떤 코멘트가 적당할까. 재밌다? 유쾌하다? 기분이 좋다? 말은 달라도 의미는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기품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기품이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면의 견결한 자기긍정이라면 그런 거지 하다가 이 사람이 쓴 시의 한 구절을 되짚어본다.


가을 밤


마루를 걸으면

삐걱이는 뼛속에서

철썩거리는 어둠.

방파제를 쌓듯

담요를 두른다.


덜컹,

무슨 소릴까?

문은 잠겨 있는데.

덜컹,

무슨 소릴까?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덜컹, 덜컹,

아아 무슨 소릴까?

암만 보아도 문은 잠겨 있는데.


스산한 바람이 부는 딱 오늘 같은 밤에, 홀로 책상에 앉아 쓴 시인가보다 뜬금없이 생각한다. 그녀는 옥탑 방에 산다고 한다. 개미가 들끓는 오래된 집의 옥탑에 살림을 차린 독신의 여자가 꿈꾸는 세계를 들여다보며 나는 행복해 한다.


오랫동안 시인을 동경했다. 시인의 마음, 시인의 방, 시인의 뜰, 시인의 사색은 뭔가 특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는 계기는 그 시인의 특별하지 않음에서이다. 동네 어디서든 만나는 푸근한 이웃 같은 매무시와 인사말, 낯가림을 훔쳐보고 놀라는 한편에서 안도한다. 정작 글을 쓴 시인의 의도는 그게 아닌데 내 멋대로 해석하고 결론내리고 자족하는 건지도. 그러나 누가 뭐란 들 어떠랴. 내가 산책의  내가 읽은 그 글은 온전히 내 것인데.  


시를 쓰던 친구가 생각난다. 지금도 시를 쓰는지는 모르겠다. 시상을 떠올리고 종이에 옮겨 적는 친구의 표정은 언제나 한가롭고 정감이 가득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든 생각은, 시인은 태어나는가 보다, 참 행복한 아이구나였다. 그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보는 재능을 시샘하고 탐낸들 훔쳐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동경만 하기로 했다.


삶은, 시에서 멀어졌다가도 갑자기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시 따위가 뭐냐고 팽개치는가 하면 묵은 시집을 꺼내 읽으며 몽상에 잠긴다. 오래된 시 구절에서 번뜩이는 이치를 깨닫고 새삼 경이감에 빠지는 무지몽매한 인간의  일상이면 어떤가. 이날 이적까지 살아온 만큼 또 살아야 할 날이 까마득하고 여전히 산다는 건 억압이고 구속이며 곤궁함의 지속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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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1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정말 마음에 와닿았거든요.

<인숙만필>도 읽어보고 싶네요.

조은 시인도, 황인숙 시인, 두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본 적은 한번도 없는데 산문집을 읽게 되네요.

겨울 2004-12-18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가워요. 저도 이제 막 <벼랑에서 살다> 읽었답니다. 맘에 쏙 드는 산문들입니다.

 

 

퇴근길에 샛노랗게 익은 모과 두 알을 주웠다. 이게 어인 횡재냐면, 모과나무집 주인이 모과를 따다가 떨어뜨린 모양인데 불행히도 함몰된 갈색 상처를 입어 버려진 것. 가방에 고이 담아 와, 현관 입구의 신발장 위에 나란히 눕혀놓으니, 그 진한 향이 달디 달다. 할머니가 계실 적에는, 동네에서 적잖은 모과를 얻어다 냉장고며 방이며 가을 멋을 냈는데. 올 해는 이렇게 모과 향을 맡는다. 어지간히도 양분이 모자랐는지 크기가 내 주먹보다도 작으나, 그 향기만은 누구한테 질세라 짙고도 깊을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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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안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하나 따고 싶지만 차마 따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습니다..ㅡ.ㅜ 언젠가 경비 아저씨 안보시면 하나 슬쩍 따올까봐요.. 갑자기 모과향이 넘 그립군요..

겨울 2004-11-1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밤에 나가서 몰래 따오세요^^

잉크냄새 2004-11-1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모과향 맡은지 꽤 오래된것 같네요. 그 진한 향기가 그립습니다.

stella.K 2004-11-1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과차 먹어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네요. 그 향기 그립네요.^^

겨울 2004-11-2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동네엔 유난히 모과나무가 많아요. 노점에서 파는 푸릇한 게 아닌 샛노란 모과가 참 탐스럽답니다.^^
 

 

아침, 가로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난다. 노란 은행잎이 이불처럼 깔린 길에 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던지. 매일 아침마다 청소를 하시던 분끼리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있었던 걸까. 소복소복 쌓인 은행잎을 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거, 모른다면 바보지. 동네 어귀뿐만이 아니다. 낡은 주공아파트를 둘러싼 넙적한 플라타너스나무도 오색의 이파리를 마구마구 흩뿌리는데 비에 젖어 촉촉한 그것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모양이 그지없이 좋다. 계절의 색과 냄새와 형태를 만끽하며 일터로 가는 이런 날들은 비록 종교는 없지만 신의 축복 같다.


오늘은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준비성은 철저해서 두툼한 스웨터를 꺼내 입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니 차가움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얇은 옷을 입고 파랗게 질린 여학생들을 보니 잔소리가 마구 쏟아지려 했다. 아이들을 보고 옷 좀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을 무심코 하다보면 꼭 엄마가 된 것 같아서 무안할 때가 있다. 확실히 십대들은 무엇에서건 겁이 없다. 아주 기본적인 예의, 고운 말씨, 웃어른에 대한 공경 따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듣기에도 생경한 욕설을 거침없이 뱉는 걸 보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절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무라는 방법도 쿨하게, 직설화법으로 한 방에 쏴야한다. 자라고, 배우고, 느끼고, 모방하고 결론내리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른 요즘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 내 자리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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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1-1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제가 있는 곳도 은행잎을 치우지 않아서 꽤 기분이 좋았답니다. 예전에는 미리 작대기로 털어서까지 치워버리곤 했는데...

겨울 2004-11-13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치우지말자는 약속을 한 것 같죠? 언뜻 어수선한 느낌도 나지만 이리저리 날리는 잎새들의 정취가 한가롭고, 찬바람이 던지는 스산함을 덮어주네요. 그리고 저희집 마당에도 감나무잎이 아우성을 칩니다. 마당 안의 것은 상관이 없는데 대문 밖으로 날리는 것들은 앞집이나 옆집에 민폐라서 밤마다 비질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