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아주 미약하다. 이런 책, 이런 만화 절대 안 읽어 라며 고집을 피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 그 싫다는 만화를 읽고 헤벌쭉 웃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간사한 마음이다. A가 추천하며 설명을 할 때엔 괜히 딴청을 피우다가 B가 좋다고 하니 그러냐? 하며 당장에 읽어치우는 고약함이라니. 도대체 나는 언제나 철이 들려나. 




오늘부터 우리는!!! 날라리가 되자고 결심한 순간 제일먼저 하는 일은? 미장원에 달려가 번쩍이는 금발로 염색을 하는 것? 혹은 밤송이처럼 머리를 세우는 것? 그리고 시작되는 좌충우돌 고교일기는 그야말로 폭소열전. 일본 만화 속에 학원 폭력물은 흔하디 흔한 소재다. 그런데 그 흔한 소재를 가지고 이 작가는 맛깔스럽게도 버무렸다. 영웅주의도 비장미도 없이 남들보다 튀어보자는 일념 하에 험난한 날라리의 길에 들어선 두 주인공의 행태는 순전히 웃어보자는 의도 외에 아무것도 없다. 눈물나도록 얄팍한 의리와 우정이 구현되는 순간조차도 허무하게 웃기다. 귀여운 건지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도통 헷갈리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 졸렬한 속임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란 없다. 묵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맞아도 그만큼의 복수열전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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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0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고 페이퍼에 올리셨군요..^^ 별점을 몇개나 주셨을까가 궁금합니다..

저도 선입관 때문에 안 읽고 있는 책입니다. 웬지 바보같은 느낌이라서..

한데, 님이 재밌다고 하시니 생각이 달라지는군요.. 저도 선입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와져 볼까요? ^^

겨울 2004-12-0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셔요, 꼭.^^ 전 당연히 날개님은 보셨으리라 생각했어요. 별 다섯은 무난합니다. 사실 애장판으로 이제 겨우 두 권을 읽은 상태라 리뷰까지는.... 아마 읽어갈 수록 감탄사를 쏟아낼 듯 합니다. 엄청 기대하고 있지요.^^
 
웨일라이더 - [할인행사]
니키 카로 감독, 케이샤 캐슬-휴즈 외 출연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영화는 포스터의 푸른빛만큼이나 온통 푸른색 일색이다. 바다가 그렇고 하늘이 그렇고 들판이 그렇다. 그러나 시리도록 선명한 파랑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여기서의 푸르다는 잿빛이  도는 푸르다니까. 그래서 내도록 우울하다가 가슴이 아프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뽑아내는 것일까. 태어나면서 엄마와 쌍둥이 오빠의 죽음을 밟고 선 파이의 삶이 눈부신 아침 같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아빠에게 버려지는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할아버지로부터 질책, 외면, 거부당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마음이 아리다.


마오리족 족장의 후예로 태어났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전사가 되는 수업에도 훈련도 참여하지 못하고 내쫓긴 파이가 한 행동은? 숨어서 질질 짜는 것이 아니다. 벽 뒤에서, 창문 밑에서 몰래 훔쳐보거나 듣고, 그것을 들켜 할아버지에게 모질고 단호한 꾸중을 듣지만 결코 시선을 돌려 도망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과 관습을 수호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은 명민하고 반듯한 파이의 자질과 지혜를 외면하고 상처 위에 상처를 더할 뿐이다.


어느 날, 해변에 고래 떼가 밀려와 죽어가고 할아버지는 절망한다. 이에 파이는 과감히 우두머리 고래의 등에 올라타 바다로 돌아가자고 속삭인다. 병들고 지친 고래를 치유하는 파이의 부드러운 손짓에 죽은 듯 누워있던 고래는 천천히 꼬리를 흔들고, 이윽고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뒤늦게 파이를 발견한 할머니는 울부짖고, 할아버지는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고래와 함께 바다 속을 유영하는 파이의 모습은 감동과 환상의 도가니다. 고래를 타고 온 소년이 부족의 선조였다는 역사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마오리족은 현대문명과의  충돌에서 처참히 패배하여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남자들은 집과 가족을 떠나 떠돌고 아이들은 전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늙고 병든 이들만이 과거의 노래와 춤을 기억하여 들려줄 뿐이다. 이에 할아버지는 새로운 지도자의 도래를 너무도 간절히 원해 왔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죽은 듯 누워있는 파이의 창백한 뺨을 만지며 속삭인다. 지도자여........


이전에 본 마오리족에 관한 영화로 <전사의 후예>가 있는데, 그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마오리족 전사들의 분장과 춤은 정말 인상적이다. 부릅뜬 눈과 길게 내미는 혀로 적을 압도하며 두 발로 힘차게 땅을 구르며 추는 역동적인 동작이 아름답고도 기괴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명의 이기 반대쪽에는 이렇듯 정신적인 것을 수호하는 이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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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마루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무릎이 시리지만 커피의 뜨거움에 자족하며 어둠 가운데 내내 앉아 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머물다 간 사람을 생각한다. 사는 것의 고달픔에 대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얘기를 나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고 믿었다.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와는 별개로 섬의 ‘고독’을 동경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립은 불행이라고 가르친다. 타인과 어울려 손을 잡아주거나 내밀지 않으면 안 된다. 언뜻 스친 대화 중에는 둘은 정상이나 혼자는 비정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각기 다른 얼굴과 성향의 사람들이 태어나 죽는 과정에서 필연처럼 거치는 ‘결혼’의 의무, 권리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집단 보다는 개인을 존중하고 무리보다는 고립을 갈구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실제로 보았고 둘이 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도 역시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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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쓰기만 하라.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와우! 그랬다.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앉고 싶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여 장문의 글을 써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못해, 안 해, 귀찮아하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적 약발도 단 하루가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놀라움 그 자체라는 것은 변함없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는 위대한 작가의 자질을 가진 잠재력의 소유자라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드니까. 어쩐지 뭔가가 허전하다 싶은 날, 책꽂이에서 뽑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곧 기분이 좋아지고 숨어있던 단어와 의미들이 두둥실 머릿속을 유영하리라. 그리고 부족하나마 완성된 한 토막의 에세이가 토해지리라.


일상은 때로 감각을 마비시킨다. 언제 어디서건 쓰라고 하지만 컴퓨터는커녕 펜과 종이도 여의치 못할 경우가 있다. 카페는커녕 어질러진 책상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쓰고 싶다는 욕구가 채워질 리가 만무하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집엔 물론 컴퓨터도 있고, 펜, 종이는 물론 시간과 여유도 구비되어있다. 그거면 되는 것일까? 정작 제일 중요한 스쳐지나간 영감의 그림자도 희미한데? 어떤 천재는 장소 불문, 시간 불문하고 써내려갈지도 모르지만 보통의 인간에게 그것은 잔인한 요구이다. 겨우 한다는 것이 이러한 푸념뿐.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시에 머물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가라. 작품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시를 쓰고 배우는 방법이다.


시 속으로 들어가라니 정말로 쉽지 않은가. 아무나 가능하다는 듯, 못 들어가면 바보라는 듯 말한다. 어떤 수단을 쓰든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으면 될 듯 하다. 그러나 문제는 시의 변덕이다. 때때로는 선뜻 열어주던 문도 제 기분이 나빠지면 결코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도 에너지라고 말한다. 회피하거나 게으름 피우는 대신 정면으로 문제와 맞서는 방법은 역시 글을 쓰는 것이다? 오, 간단한 치유법이다. 너무 쉬워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도대체 어디로? 역시 수행의 부족인가. 나는 느리고 더듬거리며 주저앉아 하염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시간을 흘러 보내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뒤돌아서지만 되돌아 나오는 법도 잊을 때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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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0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한달에 노트 한권은 꼭, 모조건 써야지 생각했는데...

책 읽고 산 노트의 반도 못 썼네요.ㅋㅋ 대단한 책이죠?

이 책을 쓴 나탈리의 글을 틱낫한의 사랑법 소개글로 만났어요. 반갑더군요,
 

 

집집마다 나름의 김장의 미학이 있겠지만 우리 집도 별나다. 시골에서는 대개 아들, 딸, 손자, 며느리를 불러 모아서 날을 잡기 마련이다. 누구네 집에는 누가 와서 얼마나 했다더라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올 해도 어김없이 서울 오빠며 동생들과 함께 주말에 모여 들었고 천장 낮은 시골집은 복작복작, 간만에 본 할머니는 증손녀, 손자 얼굴 보는 재미로 싱글벙글 환하다. 일요일 새벽 세시 경, 낮부터 절인 배추를 행구기 시작해서 다섯 시에 끝났다. 뜨끈한 온돌방으로 기어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아침 일곱 시, 먼저 일어나신 할머니가 끓인 배추된장국을 서둘러 먹고, 미리 썰고 다져 놓은 부재료를 커다란 고무 다라에 섞는 일이 본격적인 김장의 시작이다. 고춧가루, 찹쌀 끓인 것, 새우젓, 쪽파, 무, 갓, 멸치액젓, 마늘, 생강, 기타 등등 두 개의 고무 다라 가득 넣고 버무리는 일은 요령 좋은 작은 엄마의 손맛이 최고다. 




여자들이 김치 속을 만드는 동안 아빠와 아이들은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피운다. 간밤에 내린 서리가 하얗게 가라앉은 아침은 제법 춥지만, 만장일치로 일거리도 줄일 겸해서 마당에서 김장을 하기로 합의했다. 들마루 위에 척척 걸쳐놓은 절인 배추를 작은 그릇에 옮겨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아 각자 재주껏 속을 넣은 김치를 역시 각자 가져온 김치 통에 예쁘게 담아내는 게 어설픈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김장 하는 날이라고 특별히 맞춘 시루떡이 배달되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떡을 막 바른 배춧잎에 싸서 먹으니 별미다. 아이들의 간식은 호일에 싸서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다. 평소에 하나도 먹지 않던 고구마를 세 개나 먹어치울 정도. 배춧잎을 뜯어 내밀면 덥석 잘도 받아먹는 네 살짜리 막내 지솔이 단연 인기다. 일하는 제 엄마에게 칭얼대는 법도 없이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잘도 논다. 너른 마당에 탁 트인 산과 들을 배경으로 별다른 장난감도 없이 뛰노는 아이들이 정겹다. 그러면서 드는,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나가있다는 생각. 아이들은 점점 시골에서 멀어져갈 것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따라 정신없는 삶을 복잡한 도시 속에다 뿌리내릴 것이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하는 오늘 같은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김장이 얼추 끝나가자, 오빠는 벌써부터 불꽃이 사그라진 숯 위에 석쇠를 걸고 삼겹살을 굽는다. 아이들 입에 잘 구워진 고기 한점씩 넣어주고 좋아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정답다. 겨울이 시작되는 길목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거운 굴레로 목을 조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훨씬 많았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다툼 없이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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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2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님의 김장은 정말로 정겹고 즐거운 행사군요.. 시루떡을 막 버무린 김장김치에 싸서 먹는 맛이라.. 침이 싸악 돕니다요~ >.<

겨울 2004-11-2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노동과 놀이가 적당히 버무려진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온몸이 근육통과 감기기운으로 내내 시달린 우울한 월요일이 되었지만요.ㅠㅠ

잉크냄새 2004-11-3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느껴보는 어릴적 고향풍경이네요....아늑합니다...

갈대 2004-11-3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에 고구마에 시루떡에 삼겹살까지!! 침 꼴딱~^^

겨울 2004-12-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김장은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