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책 중 유난히 낡고 바랬음에도 다른 고급 장정의 책에 비해 편애하는  <싸일러스 마아너>의 특이성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웃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가는 괴팍한 성격의 직조공에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 아기 천사가 아장아장 걸어온 것, 이후 독신남 싸일러스 마아너의 삶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미녀와 야수, 꽃이 피지 않는 정원 등의 이야기처럼 절대 다수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순진무구한 여자 혹은 아이로 인해 감화되어 세상밖으로 나온다는 설정만큼 흥미진진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 농촌의 계급사회와 종교적 갈등은 대충 넘기고 오로지 관심은 싸일러스 마아너와 에피 사이에 일어나는 자그마한 에피소드들로 거칠고 무지한 남자의 아이 돌보기라는 관점에서 이 보다 재미난 소설은 없을 듯 싶다. 물론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치면 장황한 묘사와 시대적 배경을 유심히 들여다 볼 테지만 그닥 의식을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내겐 예쁘고 감동적인 작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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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다녀온 뒤 시름시름 앓았다. 버스를 서너번은 갈아타고 비탈진 길을 따라 걸어서 20여분은 걸어야 보이는 고향집은 허물어질 듯 낡았다. 어린 시절 그토록 크고 넓고 깊어보이던 곳이었는데, 성장한 이후 처음으로 객관적인 시각에 비추는 집은 이상한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집 뒤의 대숲은 여전히 푸르고, 숲 옆에 우뚝 솟은 소나무도 근사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저곳에 서 있었을까. 소나무 옆에는 둥근 바위가 버티고 있다. 그 바위 밑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비바람을 가려주고,  마른 짚단을 펼치고 단잠을 자기도 했는데, 이제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은 쓸쓸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풀이 자랄 틈도 없이 어린아이들의 발자국이 찍히던 정겨운 산이었다. 

때로는 추억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만큼 사물은 변하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뒤의 모습이 주는 괴리감은 이렇게 씁쓸한 아픔이 되는 탓이다. 질퍽질퍽 흙길이 회색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자동차들이 빵빵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시골길이 뭐가 어떻다고. 너는 도시로 나가 되는대로 살다가 고향에 돌아와 머무는 짧은 시간도 불만만 쏟아내느냐고 질책하여도 쓸쓸한 건 쓸쓸한 거다.

그럼에도 시골 밤은 여전히 까맣고 별은 총총했다. 너무 많아서 쏟아질 것만 같은데 어찌나 추운지 별빛 근사한 낭만 따위가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문하나만 열면 곧바로 마당으로 향하는 방의 구조는 아무리 두터운 커튼을 달아도 매서운 칼바람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아침, 낮은 벽돌 담 너머로 텅빈 들녘과 산이 무심한 인사를 건네는 건 과거나 현재나 매한가지. 어느 때 건 돌아올 고향, 집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 네 의무임을 잊지말라고 다짐두었다.  망아지처럼 뛰놀던 유년의 기억이 숨쉬는 산과 들, 마당에 구르는 돌맹이, 부서진 장독대를 기억의 창고에 다시금 꾸역꾸역 눌러담았다. 고향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축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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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2-0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향...한폭의 수채화같은 글이네요...추위에 떨던 별빛은 저의 고향인 바다와 똑같군요...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93년 8월이었다. 작고 얇은 한 권의 책이지만 어지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증언하고 대변하는 독특한 양식에 매료되어 하룻밤을 샐 만큼 내게는 특별한 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다스리지 못하여 울고 웃기를 반복하던 시기에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이름으로 그림 속에 깃든 역사를 추적하여 다니는 서경식의 여행기는 잠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으로 얼룩져 왔고 그것을 기록하는 화가들의 영혼은 치열할 수밖에 없음이다. 두 형을 독재정권의 손아귀에 빼앗기고 부서진 가족의 파편을 먼 이국의 땅에서 발견하고 감회에 젖어 기록하는 사람 또한 또 하나의 예술가임은 분명하다.

회화에는 일자무식이었던 내가 이 한 권의 책으로 감동받으며 잊을 수 없는 그림 몇 개를 가슴에 각인 시킨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어떤 그림이든 역사를 캐고 읽으며 이야기를 만드는 습관이 생겼으니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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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내가 아직 자유로운 영혼, 들새처럼 날으는 영혼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짐이 아직 충분히 무겁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를 읽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명쾌하고 유쾌한 언어의 유희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여진다. 한 때, 이 사람의 시에 마약처럼 취해 살았다.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를 끌어안고 아직도 꿈을 꾸는 내 나이, 서른 중반.

<새는 울고 꽃은 핀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

때로는 이런 명료함이 절실하다. 특히나 지금,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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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혼자는 외로워서 둘이랍니다, 라는 싯귀가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유달리 번잡함을 질색하는 나는 나 아닌 누군가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때가 있다.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혼자임을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럴듯한 변명이자 위안이 아니냐고 하지만 내 생애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사람들 속에서였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외로움을 모르는 병적인 인간이냐하면 그건 아니다. 적당한 고독이나 쓸쓸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범인일 뿐.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해후는 반갑고 즐겁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인사하고 떠나는 과정도 유쾌하다. 아마도 내가 질색하는 것은 사람이 지나간 그 자리의 어수선함일 것이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사고방식도 타인과의 소통에서는 적당한 위선과 연기를 해야 하니 불편하기도 하고, 여럿이 모이는 곳에서의 의식적인 배려와 낮춤이 천성적으로 타고나서 쉬이 지치는 탓도 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그까짓 것 쯤이야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즐기는 것 자체를 거북해하는 성격만 아니라면 왁자하게 놀아도 좋을 날이다. 하지만 이런 인간으로 이미 만들어진 것을 어쩌랴. 남과의 다름은 그저 차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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