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을 모르기 전에는 세상에서 나만큼 책을 좋아하다 못해 집착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비관(?)했었다. 주변이 워낙 책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기도 하고 단지 취미로만 책을 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참 별난 괴팍한 인간이로구나라는 시선을 어지간히도 받았는데, 인터넷이라는 세계에서 도처에 사는 다양한 군상들을  엿보다보니 나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적이 안도한 기억이 있다.


남의 집엘 가도 제일 먼저 책장으로 가서 소일하는 습관이 있다.  누구의 어떤 책을 읽는가를 통해 그의 성향과 성격을 가늠하기도 하고 내가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고 덤으로 빌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내 어린시절은 지독히도 빈곤해서 늘 책에 굶주렸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할 정도로 읽을거리가 늘 부족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스로 돈을 벌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을 사고 읽고 쌓아두는 일이었으니. 그런 나를 보고 가족들은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나 의아해했다. 성공하고 싶은 생각도 부자가 될 맘도 없이 오로지 책만 읽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책을 너무 좋아하면 가난해 진다더라고 하던 걱정이 씨가 되었는지 예나 지금이나 빈곤은 여전하고 그럼에도 책을 읽어댄다. 말 그대로 즐거운 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책읽기다.


사람을 좋아하고 좋아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 최고다. 빌려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도 선뜻 책을 내밀며 읽어보라고 하면 나는 아이처럼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막연히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데는 서툴지만 내게 책을 빌려주었던 사람만은 생생히 떠오른다. 그 날의 장소와 시간까지도.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늦은 저녁에 빈 교실에서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건넸던 그녀, 작고 영민하던 얼굴과 길고 검었던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뜨린 몇 살 위의 언니이자 친구였던, 잘 살라고 등이라도 두드릴 듯 애잔하게 바라보던 그녀 앞에서 나는 울었던가. 이별이 슬퍼서였는지, 약한 몸으로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진 것처럼 비장하던 맑은 눈이 예뻐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코, 쉬운 길을 노래하며 걸어가지 않았을 그녀가 그립다. 나는 그녀의 책을 족히 서너 번은 읽어치웠다.


오늘, 세상의 악습과 부조리와 가난과 소외, 숱한 상처들에서 무심하지 못하고, 번민하고, 회의하고 좌절하다 어느 순간,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 웃는, 좋은, 어린 그녀가 책을 빌려줬다. 한 아름의 책을 받아들고서도 뭐라 말을 못했다. 너무 좋으면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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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26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빌려주는 일이 저에게는 아주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차라리 한 권 사 주고 만다는^^
근데 '그녀' 참 아름다운 아낙입니다. 마음이 풍요로우시죠?^^

겨울 2006-01-2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번히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하고 후회하며 다시는 이라고 다짐을 하면서도 빌려주지 못해 안달을 하는 유형이에요, 저는.
파란여우님, 건강하시죠? '그녀'는 놀라운 에너지의 소유자라서 옆에 있으면 기운이 나요. 삶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문득문득 일깨워 줘서, 저는 매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마태우스 2006-01-26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말씀에 동감....곰님, 좋은 친구가 있으시네요^^ 님이 책을 사랑하는 거 아니까 맘놓고 빌려주셨겠죠

겨울 2006-01-2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안 보이셔서 궁금했는데, 이 먼 곳까지~
마태우스님, 부디 힘내서 우울을 극복하시기를. 오늘, 삼류소설 재밌게 읽었어요. 님의 글이 없는 알라딘 마을은 쓸쓸합니다.

비로그인 2006-01-27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곰님이 가까운 곳에 사신다면 무한으로 빌려드릴텐데..;;;;;

겨울 2006-01-2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말씀만으로도 감동이어요.^^
 

 

소설읽기를 마치고 든 생각. 아니, 이렇게 악덕한 인간이 있을 수가. 설령, 덜 사랑하는 딸이라고 해도, 그 딸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라는 인간이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죽은 사람은 죽었으니 산 사람은 살자, 그건가?


신선하고 매끄럽게 흐르는 글에 맹목적으로 빠져 재미나게 읽는 것은 좋다. 좋은데, 기분은 영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아버지가 딸이 가족이 정말 이렇게 막 가도 되는 건지. 단지 재미있자고 이런 소설을 일부러 선택해서 읽지는 않겠다. 말 그대로 게임이라면 마지막까지 유쾌한 게임이었으면 좋았겠다.


어쩌면 취향차이인가. 그런가.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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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분신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하는. 오히려 누구나 자기 분신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걸 발견하지 못해 사람들은 고독한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긴 숨이 터져 나왔다. 꽤나 긴장을 하고 읽었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은 만나지는구나. 세상에 오직 둘 만이 남겨진 것 같이 고립된 상황에서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안도했다. 수줍게 레몬을 꺼내 갈증을 해소하며 마주보고 선 자매, 가족, 너인 동시에 나. 라벤더 꽃밭에 선 그들의 미래는 한없이 투명하다.


히가시노 게이고. 영화 비밀과 만화책 헤드를 통해 이미 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선뜻 흥미가 동하는 작가는 아니었다. 이벤트가 아니라면 과연 내가 이 책을 샀을까. 소설은 물론 재밌다. 나에게 재밌지 않은 소설이 과연 있을 지가 의문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소설 자체로도 영화를 보는 듯 실감이 나고 박진감이 있다. 도시에서 도시로 현재에서 과거로 뻗어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쫒다보면 마치 이전에 본 영화를 상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생명공학의 최첨단이라는 현재, 아슬아슬한 그 경계에 선 문제를 다루고 있음이다. 솔직히 읽는 내내 무서웠다. 이게 현실이 되면 이미 현실이 되었다면 하는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과학이라는 맨 꼭대기 층에 군림한 사람들이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권력에 희생될 약자가 나일 수도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오싹 했다. 소설속의 정치가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로 선택한 방법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후타바와 마리코, 그녀들은 용감했다. 과거의 망령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끝까지 싸웠고 결국은 이겼다. 그들은 둘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쩌면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긍정적 사고방식이 마음에 든다. 누구인들 어떤가. 나는 태어났고 살았고 앞으로도 쭉 살아야만 하는 것을. 소설의 끝은 마치 시작 같다. 두 여자가 떠나는 멋진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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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일요일 아침이 좋다. 덥고 잔 이불, 내다가 빨랫줄에 널어놓고 탁탁 털면서 하얀 먼지들이 폴폴 날아가는 거 바라보는 것도, 손끝은 시려 비벼대면서도 활짝 열어둔 현관문, 조금 만 더 하면서 닫기를 미루는 것도, 마른 걸레에 물을 적셔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마루를 닦는 것도,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할 때마다 쓰레기통으로 달려가는 것도, 다, 일요일이어서 가능한 일들이다.


FM 98.5의 볼륨은 물론 최대다. 공복의 위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허기에도 서두름은 없다. 일요일엔 아침 걸러 점심이 딱, 이니까. 아, 오늘, 무얼 해야 잘했노라 칭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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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1-0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도 게으르지 않으신데요?
이불을 벌써 빨랫줄에 너셨다니....엄청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일요일 아침이예요.^^

겨울 2006-01-08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수선님. 게으름을 자랑하는 페이퍼에 잘했다, 칭찬 하시네요. ^^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대부분은 쓰레기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날이 있다. 의도하기도 전에 말이 되어 나오는 말을 위한 말은 상황에 휩쓸려 쏟아지기 일쑤다. 좋은 글을 읽을 때마다 글처럼 말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멋들어진 글을 말로 하기 위해선 그 글을 이해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좋은 글은 거울을 향한 독백이 된다.


사춘기의 혹한에 시달릴 때 소통에 대한 심각한 번민에 빠져 일시적으로 입을 닫은 적이 있다. 말들의 가벼움에 진저리를 치며 말과 글의 일치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상을 품었었다. 그래서 죽어라고 편지를 썼다. 선생님에게 친구에게 혹은 빈 여백을 향해 쓰고 또 썼었다. 절친했던 단짝과는 교환일기를 썼다. 하루걸러 하루씩 나의 독백과 그 애의 독백이 번갈아 가며 노트를 채워갔다. 그것은 나눔이나 이해와는 거리가 먼,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의 탑이었다. 왜 그렇게 말하기를 두려워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별나다는 거, 다르다는 게 미치도록 고통스럽던 시절, 단지 사춘기의 일시적인 증상이었노라 치부할 뿐이다.


사회에 나와 글보다는 말이 많아졌다.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말들을 뱉어냈는지, 저녁에 집에 돌아와 앉으면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생각도 나지 않곤 한다. 다르게 살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수록 말은 많아진다. 그렇게 이제는 무언가를 쓴다는 일이 어색하고 불편하고 귀찮아졌다. 글이 될 머릿속의 사념들은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 얇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는 책은, 책 혹은 글에 대한 나의 집착과 동경에 대한 갖가지 생각들을 낳는다. 그래서 반복해서 읽고 또 읽게 된다.

 

나는 침묵의 형태로 부재하는 단어 속에 ‘붙잡혀 있는’ 아이였다. 유아 우울증이 생긴 것은 르아브르로 이사한 직후였는데, 이사로 인해 내가 무티라고 부르던 젊은 독일 여자와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나를 돌봐주던 무티였다. 나는 실어증에 걸렸다. 나는 ‘무티’라는 이름 속에 빠져들었다. 그 이름이 내게는 엄마의 이름보다 더 소중했고, 불행하게도 지상명령이었다. 혀끝에서가 아니라 내 몸의 끝에서 맴도는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 오직 내 몸의 침묵만이 그 이름을 존재시키고, 실현시키고, 그것의 온기를 되찾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욕망 때문에,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직업 삼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거부하며 말하기, 말없이 말하기, 길목에 지켜서서 결여된 단어를 기다리기, 독서하기, 글쓰기, 이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상실이 피난처였던 까닭이다. 왜냐하면 상실은 언어에서 완전히 추방되지 않으면서 그 이름 속에 피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 자체로 외롭고 불행한 바윗돌처럼, 짐승처럼, 죽은 사람처럼. (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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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고 간직하는 어이없음을 범하고 있지요..;;; 읽어야 할 터인데..;;;;

겨울 2006-01-0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읽으세요. 서둘러 읽을 책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