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대부분은 쓰레기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날이 있다. 의도하기도 전에 말이 되어 나오는 말을 위한 말은 상황에 휩쓸려 쏟아지기 일쑤다. 좋은 글을 읽을 때마다 글처럼 말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멋들어진 글을 말로 하기 위해선 그 글을 이해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좋은 글은 거울을 향한 독백이 된다.


사춘기의 혹한에 시달릴 때 소통에 대한 심각한 번민에 빠져 일시적으로 입을 닫은 적이 있다. 말들의 가벼움에 진저리를 치며 말과 글의 일치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상을 품었었다. 그래서 죽어라고 편지를 썼다. 선생님에게 친구에게 혹은 빈 여백을 향해 쓰고 또 썼었다. 절친했던 단짝과는 교환일기를 썼다. 하루걸러 하루씩 나의 독백과 그 애의 독백이 번갈아 가며 노트를 채워갔다. 그것은 나눔이나 이해와는 거리가 먼,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의 탑이었다. 왜 그렇게 말하기를 두려워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별나다는 거, 다르다는 게 미치도록 고통스럽던 시절, 단지 사춘기의 일시적인 증상이었노라 치부할 뿐이다.


사회에 나와 글보다는 말이 많아졌다.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말들을 뱉어냈는지, 저녁에 집에 돌아와 앉으면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생각도 나지 않곤 한다. 다르게 살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수록 말은 많아진다. 그렇게 이제는 무언가를 쓴다는 일이 어색하고 불편하고 귀찮아졌다. 글이 될 머릿속의 사념들은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 얇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는 책은, 책 혹은 글에 대한 나의 집착과 동경에 대한 갖가지 생각들을 낳는다. 그래서 반복해서 읽고 또 읽게 된다.

 

나는 침묵의 형태로 부재하는 단어 속에 ‘붙잡혀 있는’ 아이였다. 유아 우울증이 생긴 것은 르아브르로 이사한 직후였는데, 이사로 인해 내가 무티라고 부르던 젊은 독일 여자와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나를 돌봐주던 무티였다. 나는 실어증에 걸렸다. 나는 ‘무티’라는 이름 속에 빠져들었다. 그 이름이 내게는 엄마의 이름보다 더 소중했고, 불행하게도 지상명령이었다. 혀끝에서가 아니라 내 몸의 끝에서 맴도는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 오직 내 몸의 침묵만이 그 이름을 존재시키고, 실현시키고, 그것의 온기를 되찾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욕망 때문에,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직업 삼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거부하며 말하기, 말없이 말하기, 길목에 지켜서서 결여된 단어를 기다리기, 독서하기, 글쓰기, 이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상실이 피난처였던 까닭이다. 왜냐하면 상실은 언어에서 완전히 추방되지 않으면서 그 이름 속에 피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 자체로 외롭고 불행한 바윗돌처럼, 짐승처럼, 죽은 사람처럼. (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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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고 간직하는 어이없음을 범하고 있지요..;;; 읽어야 할 터인데..;;;;

겨울 2006-01-0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읽으세요. 서둘러 읽을 책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