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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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상한 버릇이다. 한창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몰입해 있다가 갑자기 결국 이 소설의 끝은 어디일까, 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마지막 몇 장을 읽어치우는 것. 아마도 열에 다섯 번쯤은 그런 식이다. 결과를 알고 나면 당연히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그리고 그 밤을 새워 읽었어야 할 책이 다음 날로 넘어간다. 뻔히 알면서, 어째서 매번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지.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 내 입맛에 딱 떨어지는 소설을 만났다. 소설에 관한 어떠한 정보에도 눈과 귀를 막고 읽어서인지 스릴 넘치는 경험이었다. 물론 맨 뒤로 가서 끝을 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전력질주를 하여 읽어치운 뒤, 한동안 책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이시가미,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라는 생각에.


대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작은 눈의 통통한 남자, 우울한 표정, 책에서는 그런 이미지의 남자에겐 어떤 여자도 사랑을 호감을 느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글쎄, 첫인상은 그럴 수가 있겠다. 어디까지나 첫인상, 경험에 의하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말과 행동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상의 만남에서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눠보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난다. 허우대 멀쩡한 속물들 수도 없이 봤다. 그런 인간은 일단 냉정하게 무시다. 예의상의 미소도 싫다.

 

이시가미의 절대적인 헌신을 받는 야스코와 미사토 모녀에 대해서는 심정이 약간 복잡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싶었고, 그건 이시가미의 선택이자 필연이고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지만 화가 났다. 대학동기 유가와 마나부의 마음 그대로, 숫자밖에는 인생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한 사내의 지나치게 순수한 마음의 결정이었을 뿐. 동정하고 연민한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벗어나 과녁에 도달하고 말았다.


선입견에 의한 맹점을 찌르고 들어간다. 천재 물리학자와 천재 수학자의 두뇌싸움은 역시나 이 소설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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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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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속이지 않는다, 질투하지 않는다, 위세부리지 않는다, 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왔어. 단 한 가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세상과 맞지 않았던 것뿐이잖니?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뉴스를 통해 알 때마다 좀 만 더 살아보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곤 한다. 남과 달라서 덜 가져서 혹은 집단에 들지 못한 소외감과 무력감에 목숨을 버리는 그들에게 이 소설 속의 남자 우에하라 이치로가 가진 뻔뻔함과 자신감과 저돌적 행동력의 만분의 일이라도 가졌다면.


국가도, 학교도, 경찰도, 필요 없다. 세금,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절대 낼 수 없다. 방해하지 마라. 간섭하지 마라. 썩어빠진 의무를 강요하지 마라.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가치를 무시하지 마라. 그는, 입만 열면 사회 모든 규범, 마땅히 당연히 시키는 대로 지키고 존중하고 복종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 것들을 향해 사정없는 폭탄을 투하한다. 때와 장소 사람, 가리지 않는다. 따지고 싸울 명분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든다. 그 지독한 불신과 부적응을 보고 박수는커녕 눈살을 찌푸리던 당신,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인 우에하라 지로의 처지를 마냥 동정하던 당신은 이미 체제에 철저히 길들여진 반듯한 사람인가.


새털처럼 가벼운 소설의 탈을 쓰고 있지만, 톡톡 터지는 웃음에 섞인 시원함은 음습하게 그늘진 삶의 무거움을 단숨에 날려주는 저력이 있다. 어린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읽으며 재미를 공유하는 만화 같은 이야기와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이 특히나 매력적이다.


모자가정의 불량아 구로키에겐 말할 수 없는 연민을 세탁소집 후계자 준에게는 귀여움을 애늙은이 같지만 반듯하고 공정한 무카이에겐 경외감을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지로에게는 동정과 응원이 깃든 미소와 박수를 열렬히 쳐 주고만 싶다. 그럼에도 잘 자라 주었구나, 하면서.


물론 소설 1권의 후반부터는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진짜 주인공다운 영웅적인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그는 보통사람이 아니었어. 살아있는 전설이 아무나 되겠어.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지로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라는 인물은 2권에서부터 성격이 확 달라져 마치 다른 제목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고대하던 남쪽나라로의 이주 탓인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우뚝 솟아나며 의젓하고 믿음직스런 가장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도쿄에서의 뒹굴뒹굴 인간은 소멸하고 부지런하고 억척스런 농부와 어부로 거듭난 것이다. 못 말리는 천덕꾸러기 아빠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어른이자 투사가 되어 어린 아들의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은 감동이다.


사실 울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어, 라는 발견을 하는 자식보다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뿔뿔이 흩어져 산산조각이 나기 직전의 가족이 하나로 똘똘 뭉쳐 정을 과시하는 그림보다 멋진 건 없다. 겉만 보자면 결국 이리오모테 섬에서도 쫓겨난 아버지와 엄마가 아이들만 남기고 떠나는 거지만 그건 우울한 마지막이 아닌 또 새로운 시작이다. 소설을 읽지 않으면 그 장면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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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2006-08-1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책을 읽고싶게 쓰시는 군요.ㅎㅎ
왠지 조만간 한번 읽어 볼것 같습니다. 글 잘보았습니다.

파란여우 2006-08-17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얘기라 여겼는데,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따듯한 남쪽나라를 희망하는 얘기죠?^^

겨울 2006-08-1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즈님. 기가막힐 정도로 재밌으니 기대하셔요.

아, 여우님. 바쁘신 와중에 들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역시 반신반의 하면서 읽었는데 역시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왕창 드는 책이었어요.
 

 

집에 유폐되면서 점점 더 감정이 널을 뛴다.


1857년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나무처럼 잎을 떨군다. 바람에 견딜 재간이 없다. 매일 나뭇잎 몇 장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한 번에 많은 가지들을 부러뜨리는 폭풍도 있다. 봄이 되면 자연의 푸르름은 다시 돌아오지만 마음의 푸르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5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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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을  거의 일주일 가까이 걸려 읽어치웠다. 재미없는 만화책이 아님에도 징그럽게도 읽히지가 않았다. 뭐, 집중할 수 없는 사정도 있고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는 것이기도 해서 호기심이 반감하니 후다닥 읽을 수가 없었다 해도,  일주일은 너무했다.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받자마자 번개같은 속도로 읽고 나자 어쩐지 허망한 것이 아닌가. 이게 소설인가 만화인가라는 정체성의 의심부터 들만큼 디자인과 내용이  파격이긴 했다. 읽는 내내 낄낄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만화책을 읽나보다 단정할 정도로 휙휙 페이지는 넘어가고,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할머니의 그만 자라는 성화라니. 덕분에 스트레스가 확 풀리긴 했다. 무슨 스트레스를 받았냐고 물어도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은 없지만, 일상의 묵은 때가 벗겨진 것만은 분명하다.  

1권에서는 기상천외한 아버지의 말과 행동에 기겁을 하는 초등학생 지로에게 적잖은 공감과 동정을 하며 이 콩가루 집안이 장차 어찌될까 싶어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더랬다. 그러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아버지의 대단한 이력들과 과격한 정의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었다. 과격하고 극단적이긴 해도 그의 말은 옳았다. 너무 당연해서 까마득하게 잃어버렸을 뿐. 국가 없는 게 낫고, 학교 다니지 않아도 바른 인간이 될려면 된다. 백인백색의 인간들을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으로 제단하여 학교라는 감옥에 밀어넣는 지금의 교육 행태, 끔찍하다. 세금, 내면서 억울한 적 많았다. 국가라는 기관이 너무 거대해서 차마 반항을 못할 뿐이지 누군들 기쁜 마음으로 낼까. 세상은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왕따 당한다. 그래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석에 끌려가듯이 여기 저기의 숱한 단체에 이름을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혼자, 개인을 인정해 주지 않는 풍토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꽁꽁 묶여 사는 가여운 족속. 조금 다르게 살라치면 괴물 취급을 당하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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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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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읽는 줄리안 반즈의 소설. 오호, 놀랐다. 사실 중간까지는 건성으로 읽었다. 그렇고 그런 남자의 재혼스토리려니. 딱히 어떻다, 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평범한 그레이엄이란 남자의 바람과 불륜, 이혼과 재혼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는 없으니까.


남자에겐 사실 과분해 보인다싶은 여자와의 재혼, 감지덕지 잘 살아주면 좋겠건만 미세한 균열이 시작된다. 지독하게 사랑해서? 아니면 삶이 무료해서? 삶이 그대를 속인 것도 그녀가 그를 고의적으로 기만한 것도 아닌, 단지 과거일 뿐. 그녀가 그를 만나기전에 만났던 혹은 관계했던 기타 남자들의 흔적을 찾아서 탐정놀이를 시작하는 남자의 기행이 조금은 즐거웠다. 훔쳐보는 재미랄지 이 집요한 남자의 심리상태에는 소설을 읽는 이가 여자라고 가정할 때 그 쾌감이 배가되는 기쁨이 도사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밑도 끝도 모를 질투를 배설할 창구, 상담자로서 선택한 친구가 알고 봤더니 그녀의 옛 남자였더라. 쇼킹할 법하다. 뒤로 자빠질 일이긴 하다. 쫓아가서 주먹 몇 대 질러주고 고래고래 고함 몇 번 치면 납득할 법도 한데, 이 남자, 지지리도 못났다. 아니 무섭다. 어쩌면, 남자가 아니라서 모르는 건가. 질투의 힘을 과소평가해서?


진짜 많이 놀랐다. 억, 소리가 나며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정도로. 이야기는 가볍다. 매끄러운 문장들 사이로 유영하는 그의 감정들은 깊지만 학자라는 직업을 생각할 때 납득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유, 결국 사유로 끝장이 나려니 했던 안일함에 머리를 후려치는 충격이다. 지루할 정도로 잔잔하던 드라마가 갑자기 피가 튀는 공포로 돌변하는 것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이 궁금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만큼. 그래서 부랴부랴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주문했다.  한 손으로 들고 읽기에 딱 맞는 크기의 아주 예쁜 노란색의 자그마한 책이다. 어쩌면 책들이 이렇게 점점 예뻐질까. 요즘엔 바라만 봐도 눈과 마음이 즐거운 그런 책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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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1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선물받고 좋아라했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는..;;;
웅. 리뷰 보니 참 읽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