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 곳곳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식료품점에서 반조리된 냉동식품을 사다 먹거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 먹을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키워지거나 재배되었으며 어떻게 조리되었는지, 어디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 음식들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그 동네의 식료품점에 진열되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 그것이 그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투입되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재정적 수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괴물같이 변해 버린 기업들의 탈취를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건강과 후손들이 살아갈 이 지구의 건강이 주주총회에서의 결정(그것은 당연히 기업의 수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일 것이다.)에 좌우되는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대 기업의 탐욕 앞에서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환경은 파괴되어 가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들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그만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고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그저 현상을 되는 대로 인정해 버리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자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든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제인구달, 희망의 밥상, 27쪽>

 

이 책은 눈으로만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절박하다. 첫 장부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옮겨적고 싶은 글이다. 결국엔 옮겨적는 걸로도 성에 차질 않겠지만. 이런 책을 교과서로 채택하여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책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달달달 외워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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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업의 이윤추구는 '종자개량'으로 까지 이어져서 생물학적 변종에도 기여합니다.
식민지와 영세 소작농을 향한 경제적 착취와 생명에 관한 무서운 재앙이지요.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건
대개 눈에 보이는 '건강'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거죠.
경제적, 생물학적 측면을 무시하구요.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카길'사와 '스타벅스'로 거론될 수 있겠슴다.
이건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착취'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우몽님의 지적처럼 교과서로 채택한다면 가난하거나 덜 풍족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나누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을거라는 말입니다.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는거죠

겨울 2006-12-0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유전자 변형 곡물, 식품, 작물, 사료 등에 관한 글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어요. 남의 나라 일이려니, 아직은 우리의 농업이 살아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거든요. 정말 살이있나요? 이미 다국적기업의 달콤한 술책에 포섭되어 선량한 가면을 쓰고 뒤로는 이익에 눈이 멀어있지 않나요? 에효, 무서워요.
 
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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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재미 혹은 흥미다. 흥미는 재미는 떨어져도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수명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생태주의 소설의 효시라는 데 번쩍 손을 든 이 책은 역시나 재미보다는 인내심이 조금 많이 필요했던 흥미로운 소설이다.


<송어는 미국에서 어쩌면 가장 흔한, 혹은 미국인들과 가장 친밀한 관계가 있는 미국의 대표적 물고기...... 그래서 어느 의미에서는 미국을 상징하는 물고기라고 할 수........ 또한 송어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잃어버린 미국의 꿈일 수도 있고, 기계문명이 쫓아낸 푸른 초원이라고 할 수도.........> 라는 저자의 인터뷰를 읽으며, 미국, 미국, 미국이란 단어에 살짝 거부감이 드는데. 시대가 시대고 때가 때인지라 그 위화감이라니. 리처드 브라우티건. 가난했던 그는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 배불리 먹어보려는 생각에 경찰서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오리건 정신병원으로 보내 전기충격 치료를 받게 했다. 는 이력에 흥미는 돋긴 했지만  배고프고 추워 유치장을 선택했다는 사람들 얘기는 심심찮게 들은 얘기라 놀랄 일도 아니고 다만 정신병원행이라니. 이 사람 엄청 미움 받았구나 싶더라. 뭐, 표지에서부터 나 대단해요, 라는 이미지가 풀풀 날리지만.


책에 대한 정보가 미비할 때, 가장 먼저 읽는 것은 작가의 이력 그리고 해설이다. 한번으로는 부족해서 두어 번을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반복해서 읽은 듯. 오, 이런 대단한 책이었어? 군침을 흘리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미국의 송어낚시군. 혹은 미국의 송어낚시양의 이야기는 상당히 기묘하고 낯설었다. 이렇게 짧고도 우스운(?) 이야기 안에 그런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단 말이지.


글쎄다. 그가 살았던 나라, 이웃이라면 한결 공감하기가 쉬웠을라나. 도무지 아리송하고 에둘러 가는 이야기에 자꾸 딴 짓을 하게 만들지만 결국은 소설이다. 이런저런 거창한 꼬리표를 떼고 모르는 건 대충 넘어가면 술술 읽힌다. 2쿼트 분량의 쿨에이드 드링크를 1갤런 분량으로 묽게 타서 먹어야했던 시절의 가난이나. 마리와 칼라스와의 저녁 만찬과 호두케첩. 송어하천인줄 알았던 나무계단이나 노파와의 만남.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송어가 된.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월든 호수에서 두 화가가 말하는 정신병원에의 미래 같은 거. 그리고 송어들이 싫어하는 찰스 헤이만씨는 물론이고 포토와인에 취해죽은 송어 이야기도 나름 비장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 ‘최후의 만찬’이 낚시의 미끼로 둔갑하다니 참, 그의 조크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럭저럭 적당히 지루하고 썰렁하고 오묘한 장들을 읽으면서 문득 이 책을 읽고 심기가 불편했을,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송어낚시에 반하는 삶을 정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심심찮은 애도 정도는 올려야겠다. 사족이지만 표지 사진은 안보는 게 좋았을 걸. 그 사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날질 않는다. 1984년. 브라우티건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설마 캘리포니아 관목 숲에서?). 그가 언급한 헤밍웨이처럼. 왜 그랬을까. 좀 더 살아서 더 치열하게 그의 나라를 조롱하며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의 나라가 지금 보다는 나았을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는 일본 문화와 문학의 예찬론자였단다. 작가 중에는 오에 겐자부로를. 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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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공식적인 첫 눈이 소복하게 쌓인 감이파리들 위에 내렸다. 건드리지 않으면 녹지 않을 딱 그만큼. 커다란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누군가 사다 놨는데 제법 쏠쏠하다) 쓱싹쓱싹 마당을 쓸면서 진짜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혀에 돋은 바늘. 그렇게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건만 이놈의 입병은 낫을 만하면 돋아나고 낫을 만하면 생겨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지나칠 정도로 펑펑 놀고 있고만, 어째서, 어째서.


난로에서는 물이 내도록 끓는다. 가스 불에 올린 물은 끓을 새라 아까울 새라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난로 위의 주전자는 뜨거운 김을 퐁퐁 품어 내거나 말거나. 이 난로는 회심작이다.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외풍 센 집안 공기를 한풀 꺾어 놓고 이런저런 용도로 잘 써먹고 있다. 시골에서 공수해온 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올려놓고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구워 먹기에 딱. 냉동실에서 묵은 떡들을 찾아내 굽는 재미도 괜찮다. 맛은 그저 그렇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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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02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눈이 왔군요. 난로의 온기를 상상해봅니다. 따뜻하네요. 고구마도 굽고 떡도 굽고.... 혓바늘이 돋아 불편하시겠어요. 내일도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겨울 2006-12-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진짜 겨울이 왔어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마음이 막 두근거려요. 이상하죠? 혜경님, 건강하시고, 따뜻한 날들 되시기를.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보는 재미는 남다르다. 대개는 원작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찾아보지만 영화를 본 뒤에야 원작의 존재를 발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보다 원작에 대한 호기심이 반감한다. 궁금하긴 해도 영화가 좋은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책,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도 같은 예다. 멋진 영화에 매혹되었지만 그 원작이 짧은 단편이라는 사실에 안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영화에 대해 품었던 환상이 깨질까봐서? 서점에 가서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면서, 사실은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들었으면서도 구입은 못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를 끼워주는 행사에서 망설임 없이 덥석 손을 뻗었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가 읽고 싶었던 게 첫째 이유. 덤이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계산속이 두 번째.


‘남자들은 머핀을 싫어해’라는 맨 마지막에 있는 단편부터 읽었다. 이상하게 단편들은 처음엔 좋다가 나중에는 흥미도 떨어지고 대충 읽어지니까 아예 처음부터 끝부분부터 읽는 게 좋다. 독특했다. 별장에서 일중독자 남자를 기다리는 미미. 이런저런 불평을 하면서도 그 상황을 즐기는 여자. 마흔두 살 남자의 긴급 구조대원 타입의 섬세한 섹스어필에 홀딱 빠져든 그녀는 서른한 살이다.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장품과 옷 몇 벌, 시부사와 다츠히코의 책만 들고, 아, 그리고 아주 큼지막한 물건, 시몬을 옆에 끼고 나는 멋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을 나섰다. 비 내리는 뿌연 바다에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270쪽) 결국 미미는 기다리던 남자 렌을 버리고 남자의 조카 시몬과 함께 별장을 떠난다는 얘기다.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머핀을 만들었던 이유는 자기만족감 때문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우유부단한 남자와의 담담한 이별을 그린 ‘사로잡혀서’의 여주인공 리에 이야기는 더 쇼킹하다. 8년의 결혼 생활에 아이가 없는 미노루와 리에 부부. 어느 날, 거래처에서 만난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폭탄을 떨군 미노루는 그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고 칭얼댄다.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맹한 여자와 가정이란 올가미에 생포되어 사로잡혀 가면서도 미련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남자를 리에는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얼마동안은 방광염이 도져도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게 서글플지 모르지만, 리에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실감했다........자유로워진 몸에는 어떤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240쪽)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조제도 그런 여자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혼자가 된 조제는 우연히 들를 츠네오를 필사적으로 불러 세워 꿈꾸던 것을 이룬다. 동물원에 호랑이를 만나러가고, 바다를 보고, 수족관이 있는 여관에 머무는 것들이다. 조제에게 츠네오는 일생에 단 한번 오는 기회였다. 어쩌면 바짝 마른 종이인형처럼 살았을 조제지만 츠네오를 통해 세상 밖으로의 모험을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나머지는 그냥 덤으로 살면 된다.


각 이야기마다 나오는 여주인공은 다르지만 닮았다. 생에 초연하고 달관한 듯, 집착, 불안, 질투, 소유, 이기심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의 삶은 강하면서도 유연하다.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수의 여자들이 꿈꾸고 원하는 것, 그녀들의 내면과 심리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 새롭다. 이 소설, 이 작가, 다나베 세이코를 이렇게 뒤늦게 알게 돼서 미안하지만 더 늦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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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과 소재에 혹해서 구입했지만 읽는 내내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일단은 소설이라서 싫건 좋건 끝을 보았지만, 감동을 쥐어짜는 이야기의 미덕만은 박수를 쳐야겠다. 낯선 상황이지만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멋지다는 감탄사를 뿌리면서 몰입에 몰입의 노력을 기울이다가도 결국은 허구일 수밖에 없잖은가, 하고 맥이 탁 풀려버리지만, 거기까지 끌어당기는 중력만은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또 그것이 그들 소설의 결정적인 미덕일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듯 태어난 하루에 대한 아버지, 어머니, 형의 사랑은 가히 절대적이다. 강간범의 자식을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아버지는 신에게 묻는다. 신의 대답은. 너 혼자 생각해. 하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게 그들의 선택이었다. 어떤 의문도 회의도 불신도 망설임도 없이, 한 치의 티끌 같은 거리낌도 없이 하루라는 생명을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로.   


이 소설은 읽는 이가 깊은 생각과 고뇌를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이런 결정을 내렸으니 받아들여. 한다. 교훈과 감동을 주기 위해 작정한 우화에 가깝다. 재미와는 다른 웃긴 이야기다. 그렇다고 웃음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우습지만 너무 진지하다. 강간범이 죽어 마땅한 인간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비정상에 가까운 윤리의식을 들여다보면 어이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하루의 친부라는 사실은 신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다. 출생의 가혹한 비밀을 끌어안고 결벽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하루의 극단적인 선택에는 ‘유전자’라는 천형을 짊어진 자의 고통이 배어있다. 슬픈 중력 삐에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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