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충격을 두려움과 공포라 부르겠다. 산다는 거, 더블어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세상에는 이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두 부류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봄이 불러올 재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염원과 소망, 의지의 집합체가 침묵을 깨울 가능성과 함께 영원한 무지의 무덤에서 잠드는 것의 선택을 의미한다.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난 이제 시장에서 벌레먹고 초라한 채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 작고 못생긴 과일을 달게 먹겠다. 몇 마리의 모기나 파리를 향해 스프레이 모기약을 분사하지 않겠다. 개미들의 행렬을 못본척하고 나무를 기어오르는 벌레와 새들을 기쁜 마음으로 응시하겠다. 화단 곳곳을 기웃거리는 잡초에게 경의를 표하겠다. 빠른 기차의 미덕만큼 낡고 느린 기차가 보여주는 풍경과 소리의 가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위해 희생한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 레이첼 카슨의 이 책에 그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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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뒤의 소년 SAM
톰 홀만 주니어 지음, 이진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과거에도 앞으로도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이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픈 샘을 응원하며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긴긴 여행의 종착역에 도달한 듯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오래도록 울었다.

샘은 멋진 부모님을 가졌다. 그의 생명을 만드셨고 지키기 위해 고난을 선택하셨다. 한치의 망설임도 의혹도 없는 결정이었다.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 당당하고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가는 샘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망설임이 절대 없다. 누구도 샘이 될 수는 없다. 가정도 불가능하다. 샘은 혼자지만 동시에 혼자가 아니다.

샘은 기적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의 이름이다. 그것은 신의 뜻일까. 샘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일 것 같다. 다른 이의 희망이나 구원이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리라. 샘은 단지 조금 더 평범했으면 바랬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과 얼굴은 성자와 동일시된다. 아름답지 않은 반쪽 얼굴을 보며 사람들은 순교자를 떠올리지 않을까.

망상은 그만. 샘은 착하고 순진한 남자아이다. 예쁜여자애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보통의 소년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마비된 몸과 일그러진 얼굴과의 힘든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떻게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원초적 의문이 파고든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는 게 가능할까. 샘이 된다면 과연 살아낼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샘이 거기 있음으로해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포기했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샘의 존재이유일지 모른다..... 다른 이의 필사의 생존을 바라보는 타자의 비열한 시각이지만 빈약한 의지를 지탱하는 지팡이가 절실히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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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숙의 만화를 좋아하지만 작가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 만화계의 불황이 심각하다는 말을 듣는데, 작가들의 스스로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한 것도 불황의 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매체든 뛰어들어 자기를 알리고 작품을 알리려는 노력, 언젠가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와 주겠지 라는 안일한 사고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심각하긴 심각하다. 재미있는 만화를 꼽으라면 일본만화가 먼저 떠오른다. 재미있는 일본만화를 읽지 않는다고 우리만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까? 개성있는 신인만화가의 발굴에도 출판사가 발벗고 나서야한다. 공모전을 자주 열어야한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은 투자인가? 정부 혹은 법인의 투자. 만화책 자체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가 먹힐리가 없지.

신일숙의 만화는 가벼운 소일거리의 해피엔딩 만화가 절대 아니다. 길건 짧건 그녀의 만화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마치 비현실적인 듯 낯설고,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얘기들이 꿈처럼 펼쳐진다. 부정하지도 않지만 긍정도 아닌 무엇이 있다.

루딘 나이츠, 현재를 살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남자의 휴식처. 어느 날 비처럼 천사가 내리고 남자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녀와의 필연적인 결혼, 그리고 짧은 안식과도 같던 행복한 시간이 흐른 후 예고된 이별이 조용히 찾아든다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는 극히 짧지만 절대 단숨에 읽어치우고 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오로지 행복을 원하면서도 비극에 매혹되는 경향이 있다. 영화도 책도 슬픈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입으로는 싫다 싫다 되뇌면서도 눈과 귀와 가슴은 그곳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찍힌다. 신일숙이란 작가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심리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지금 작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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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대전기, 소델리니교수의 사고수첩 등의 작가 이정애는 한국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영역에는 근접도 모방도 불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나 쉽게 건드리지 않는 주제와 익숙하지 않으나 감칠맛 나는 글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마약과도 같은 효과가 있다.

그녀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아테르타 연대기'는 초기작에 속하고 그림도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자유분방한 펜선과 비쩍 마른 몸들, 여자보다는 남자를 능숙하게 잘 그리고 유쾌한 유머감각으로 무거운 주제를 아주 가볍게 희석시킨다.

때는 BC 481년 그리스의 아테르타, 남자보다 힘이 센 여전사 디오클리온은 여인보다 수려한 자태의 소유자인 청년 이니아스에게 첫눈에 반하고만다. 그들은 실상 서로가 극점에 있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애제자였으나 금지된 사랑에 빠져 지상에 유배되었던 것. 사랑스런 여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야만적인 디오클리온의 저돌적인 사랑에 혐오를 느끼며 달아나던 이니아스는 어느날 문득 그토록 혐오하던 이에게서 연민과 동정이 어우러진 운명적 사랑의 실체를 만난다.

디오클리온이 자신을 혐오하는 이니아스에게 '맹세하지만 이제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 정말이야 나도 그대를 미워해! 미워해! 미워해!'라고 울며 소리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아닌 웃음이 터져나온다.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갈구하는 디오클리온의 방식은 안타까움보다는 그렇게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절대성과 순수성이 결국 이니아스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이뤄질 수 없는지도 모르오. 그대에게나 나에게나 결국 파멸을 가져올 테지.. 틀림없이' '그대를 신뢰하지 못하듯 사랑을 믿지도 않소.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해. 나의 넋은 먼지로 가득 차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니아스는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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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13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이해가 잘... 그러니까 외모가 좀 그래도 순수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건가요?

겨울 2004-02-13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모나 성격에서 양 극점에 선 남녀라도 그들의 만남이 신에 의해서 맺어진 운명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거죠. 단정, 엄격, 질서, 조화의 아폴론적 인간과 역동, 열정, 광포,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일지라도요. 인간사에 개입하는 고대 신들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읽더라도 흥미진진합니다. 대표적인 만화에 신일숙의 불후의 명작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는 만화가 있지요.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몇 년 전의 일이다. 대여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먼지 쌓인 구석 모퉁이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기형도의 시집이며 산문이며 무엇이든 자료가 되는 것이라면 모으는 중이었다. 일단은 그 책을 빌려서 집으로 와서 꼼꼼히 읽은 뒤,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외국소설 중 스릴러물로 한 권을 골랐다.

물론 교환하기 위해서다.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고 기형도에 관한 책이 대여점에서 인기가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담뿍 미소를 짓고 제안을 했다. 또한 가져간 책이 당시에 인기있던 베스트셀러라서 주인이 거절할 이유가 전혀없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기형도의 순진한 얼굴이 큼직하게 박힌 얇은 이 책을 아직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물론 돈을 주고 새 책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대여점에서 찬밥덩이로 취급될 것을 뻔히 알면서 버려두기 싫다는 당시로서는 절실한 이유였다. 누군가에게는 하찮지만 내게는 귀한 것들이 어딘가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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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1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기형도님을 돌아가신 후에 알았어요. 알고 나니까 그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더군요. 그런 사람이...존 레논, 커트 코베인, 김현....등등이랍니다.

잉크냄새 2004-02-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몇번을 집었다 놓은 시집중에 하나가 기형도님의 시집이었는데, 다시 한번 접해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