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잠복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SNS의 영향력이 커 지면서, 독자와 소통하게 되는 건 작가 뿐만의 일은 아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카페 등을 통해 출판사 역시 독자와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중에도 내가 유난히 애정하는 건 북스피어의 블로그(http://www.booksfear.com) 이다. - 직원 아님. 북스피어의 블로그를 꾸려가는 건 북스피어의 대표이다. 북스피어는 소규모 출판사임을, 소위 말하는 장르문학 출판사임을 숨기지 않는다. (얼마 전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기자와 김중혁 작가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장르문학'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편의상 써 보도록 하자.) 그러면서 북펀드를 모집하고 독자 교정을 모집하고 독자와 출판사 직원들간의 만남을 끊임없이 주선한다. 어떻게 보면 평범해 보이고, 요즘 많이 하는 추세와 다름 없어 보이지만 그 과정에는 북스피어 만의 재기와 북스피어 대표만의 고집이 숨어 있다. 그 재기와 고집에 반한 독자는 한 작가의 전작주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출판사에서 내는 모든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모비딕 출판사의 책을 놓고, 왠 북스피어 이야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다 이 책의 저자 '마쓰모토 세이초'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 등단을 하고, 마흔 일곱 나이에 전업 작가로 들어서선 늦은 만큼 일분 일초의 허비 없이 글을 썼다는 문학에의 애정을 보여준 일본 추리 소설계의 거장. 이 거장의 책은 두 출판사, '모비딕'과 '북스피어'에서 판형과 디자인을 통일하여 출간 되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하나의 숙원 사업처럼 되어 프로젝트 형식으로 두 출판사가 힘을 합쳐 출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직원 아닌데 자꾸 직원처럼 흘러가네;;) 자신의 신념이 닿아있는 책들을 소신껏 출판하는 모습이 낭만따윈 없어야 한다는 출판계에 마지막 남아있는 낭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분야의 마니아들이 말하는 스릴을 온전히 느끼기엔 그 쪽 감성이 모 나 있는지라, 추리소설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게 '읽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준 건, 마쓰모토 세이초가 아니라(사실 누군지 몰랐으니까) 순전히 이 두 출판사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잠복>을 읽은 후엔, 이제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이름만으로도 책을 선택할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1955년에서 1957년 사이에 발표 된 단편들이라는 이 작품들은 지금 쓰여지는 작품들과 비교해도 결코 촌스럽다거나 색이 바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전의 느낌이 없는 고전, 그것이 내가 이 책에 붙인 또 하나의 이름이다. 악을 행한 자가 갖는 불안감, 욕망이 현실을 지배할 때 생기는 균열, 타인의 삶에 대한 집착 등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성격은 그 시절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동시대라는 것을 무색하게 만든다. 책에 수록 된 단편 중 <일년 반만 기다려>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인상적이다. 남자가 등을 돌릴 것이란 걸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남자의 독백은 선과 악을 넘어서 용인될 수 있는 거짓이 어디까지일지 생각하게 했다.
마지막 단편으로 향하는 속도가 아쉬웠고, 『밑줄 긋는 남자』에서 로맹가리의 책을 일년에 하나씩 아껴 읽는 여자 주인공의 심정이 내게 왔다. 하지만, 마츠모토 세이초를 나는 너무 늦게 만났고 그렇기에 지금부터 열심히 그의 작품을 따라가도 그가 보여준 열정 덕에 많은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은 아쉬워 할 때가 아니다. 조금 더, 조금 더 읽고 싶다. 조금 더,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