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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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페이지나 되는 분량이 쉴새없이 넘어갔다. 이런 흡입력은 오랜만이었고, 책의 두께를 위협하는 재미도 오랜만이었다. 프랑스 소설이 주었던 매력에 오랜만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참 '오랜만'에 경험하는 여러 감동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했던 감탄의 말은 이제 끝이 났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작가 '에릭 오르세나'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젠, 그 작가에게 빠져들 차례다.

이 책의 소재는 단순하다. 사랑. 조금 더 자극적으로 보자면 불륜. 이 단순한 소재가 원예와 문학과 만나 엄청난 스토리를 탄생시킨다. 한 명의 여자와 단란한 가정을 꾸려 오래오래 잘 살고 싶었던 가브리엘은 엘리자베트를 본 순간 자신의 의지만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존재함을 알게 된다. 자신의 일과 자신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굳게 지키고 싶었던 엘리자베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명은 사랑을 지키고, 한 명은 자신이 만든 법규를 지키며 산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지켜왔지만, 자신과 상대에 대한 믿음은 사랑을 굳건하게 만들고 유지시킨다. 그리고 그 믿음 덕에 그들이 공유하지 못한 시간 역시 그들의 이야기가 되고 전설이 된다. 그 전설 속에는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피었다가 지고, 기다리면 다시 오고, 세심하게 돌봐주어야 하는 식물들의 삶과 사랑이 없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존재한다. 나는 파리 식물원, 베르사유 정원, 알카사르 정원, 시싱허스트 등, 그들의 사랑이 이어져 나가는 정원들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관리자가 된다. 가브리엘에게 열쇠를 빌려주고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며 사랑이란 한 사람의 기다림, 혹은 한 사람의 믿음으론 지속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비록 불륜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딴 것이지만,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으면서도 그 아이에게 낭만을 기대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한 때의 쾌락이 아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존재했다. 그것이 이 둘의 사랑을 한낱 신파 혹은 속물적인 무엇이 아닌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돋보이게 한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이나 꽃병에 꽂힌 꽃과는 다른 잘 가꿔진 정원에 피어난 제철 꽃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모든 삶에는 문학이 존재한다. 기사문학에 대한 무한한 애착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엉뚱한 기사 행동을 하며 둘시네 공주를 지키려 한 돈키호테처럼 사랑이 우리를 정신착란의 상태로 몰아 세상을 아름답거나 혹은 어지럽게 만들고 그 사람이 전부인 것처럼 만든다. 또한 원주민들의 지배자가 되어서도 자신의 죄의식에 늘 시달린 로드 짐처럼 사랑을 쫓는 엘리자베트의 마음 속에는 가족에 대한 죄의식이, 가족을 지키는 엘리자베트의 마음 속에는 가브리엘에 대한 죄의식이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문학이란, 결국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이 책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보여준다.

문학과 연결되는 또 다른 문학, 정원의 문과 연결되는 하나의 이야기의 시작, 이 소설은 세상 모든 것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듯 이 이야기 역시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와 연결 되는 그들의 손녀 가브리엘라에게 전달할 가브리엘의 이야기 였음을 말하며 끝이 난다. 결국 이야기란, 문학이란, 정원이란, 사람이란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순환고리 속에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마지막 장에 엄청난 찬사를 보내며 이 작가를 기억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어진다. 자신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딸 모두가 가브리엘 본인의 존재를 몰랐고 가브리엘의 역사를 알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무언가가 사라져도 결국 이야기는 남고 그 이야기가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걸.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삶이자, 이 세계의 문학이 흘러가는 힘이 되는걸. 그 힘을 믿는다면, 이 엄청난 소설에 감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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