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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식당 - 먹고 마시고 여행할 너를 위해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일상이 지겨워질 때면, 회사 일에 지칠 때쯤이면, 습관처럼 여행 계획을 세운다. 지도를 펴고 가고 싶은 나라를 이곳저곳 찍어두고 며칠 동안 여행을 다닐 것인지, 루트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을 타고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먹을 것인지 상상한다. 그러면 여행 끝. 당분간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에 이런 계획들이 실천되는 것은 아마도 몇년 후쯤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1년 정도는 그런 계획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 나도 꽤 단단히 발을 내린 것 같다. 아니면 무뎌졌던지. 이런 단단히 내린 발과 무뎌진 가슴을 살짝 풀어헤칠만한 여행책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쏟아지는 여행책들 덕에 웬만해서는 여행책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인데, 이번엔 너무 방심했지 싶다.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버마. 가장 최근에 계획했던 여행지의 루트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한 번 당했다. 그 많고 많은 여행지 중에 하필이면 가장 최근-그래봤자 1년 전쯤- 꿈꿨던 여행지라니. 그리고 이 책에는 여행 정보가 전혀 나와있지 않다. 수많은 여행책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최근에는 여행 정보를 수록하지 않은 여행책, 작가의 감성에 더 충실한 여행책들이 나오고 있다. 차별화를 두기 위한 하나의 전략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내 그 방향으로 수많은 책들을 또 쏟아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여행 정보도, 작가의 감성도 최소화한다. 이 책을 채우는 것은 길 위에서 만난 먹거리들과 그 먹거리들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말 오전을 생각하면 된다. 햇살을 받으며 느즈막히 일어나 여유로운 하루를 시작하려고 텔레비전을 켠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맛집 프로그램인 것이다. 물론 이제는 방송에 나오는 맛집도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은 그 하루에 먹어야 할, 먹고싶은 음식이 되어버린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오랜만에 여행자의 간질간질한 감성을 느껴보려고 책을 딱 펴는 순간, 여행을 떠나야 하는 목적이 일탈 혹은 휴식이 아니라 식도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거창한 음식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매연에 버무려지고 MSG의 향연이 펼쳐질 듯 하여 평소에는 잘 쳐다도 보지 않는 노점상의 음식을 위해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리고 냄새가 밀려온다. 내가 맡본 것들은 한국화 된 음식이었겠지만, 그 음식 냄새 위로 그 장소의 소리, 풍경 등이 함께 겹쳐지며 한국화 된 음식의 냄새는 점점 향토적인 냄새로 변해간다. 그 순간, 눈을 딱 감지 않으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게 되는 수도 있다. 조심하자.
다행히도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간 것은 기차 안이었다. 비록 휴식이나 일탈이 아닌 일 때문에 기차를 타고 있기는 했지만, 장소의 이동이라는 것이 때로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생기있게 만드는 법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은 생기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우고, 평소 계획을 세울 때보다 더 심난해 질 뻔했다. 이미 그 나라의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냄새가 내 코를 잡고 끌어당기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