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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사라진 직업들
미하엘라 비저 지음, 권세훈 옮김, 이르멜라 샤우츠 그림 / 지식채널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E.H. 카가 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가고 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일 뿐 믿을만하지 않다던 나의 궤변은 더 이상 스스로의 합리화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에 필요한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과거의 산물을 재배치 혹은 재창조 함으로서 일어나는 것임을 경험했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감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역사'라는 것이 단순히 시대적인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내가 그래도 어느정도 자랐다는 증거가 될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말았다는 증거가 될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이 책에 관심이 간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제는 사라지고 만 과거의 직업들을 현대에 적용시킬 어떤 아이디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심. 점점 머리가 굳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실감은 더 이상 창조적인 발상이 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한계에서 오고 있었다.
그런 기대심으로 읽은 이 책이 내게 반짝이는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이 책 자체가 바로 그 반짝이는 아이디어였다. 직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직업들이 재미있는 삽화와 함께 소개되었고, 그 직업들과 그 삽화는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할만한 자료들과 함께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그 나라의 그 시대상을 그 어떤 문서보다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책에서 소개 된 '고래 수염 처리공'이나 '오줌 세탁부' 또 '커피 냄새 탐지원', '지하관 우편 배달부', '가마꾼'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그 직업이 있던 시대에 유행했던 의식주에 관해, 그것을 지배했던 지배 계층에 관해, 그리고 그런 지배 아래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서프라이즈'의 재현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은 내가 바란 순간의 반짝임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더 큰 범위의 반짝임이 지나갔다. 지식과 재미를 한 번에 추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사소한 관찰에서 오고 있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유쾌한 책이었지만, 그것이 알려주는 것은 결코 가볍거나 사소하지 않았다. 이미 사라져 버린 많은 것들, 그것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재미있는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달은 것은 이 책이 준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아빠는 오래전부터 내게 사라진 옛말을 찾아보라는 말을 하셨더랬다. 할머니가 쓰셨을 옛날 서울의 아가씨들 말투, 할아버지가 쓰셨을 옛날 시골 말투 등을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얻어내고 두 분이 돌아가셔 모두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왜 그런 말을 아빠가 하셨는지 알 것만 같다. 허투루 듣고 귀찮다 넘길 것은 이 세상에 결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