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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여자가, 서른 셋의 남자가 쓴 글을 읽는다. 여자는 여전히 서른이지만, 남자는 어느새 오십대 중반의 사내가 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엔 20년의 간격이 있지만, 남자의 글은 그 20년을 채워 버린다. 결국 남자의 글로 인해 여자와 남자는 비슷한 나잇값을 해야 하는 시간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자와 여자의 추억은 같을 수가 없다. 남자의 서른 셋은 70년대를 추억하는 서른 셋이었지만, 여자의 서른은 90년대 이전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서른이다. 추억의 간격 역시 20년이다. 하지만 남자의 글이 그 20년의 흐름 역시 채워버린다. 때론 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버린다. 이처럼 멋진 존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20년 전에 출간 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개정판이 나온 유하 시인의 산문집을 보며 나는 다시 글이라는 존재의 매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부끄러워 잘 하지 않는 문학에 대한 사랑고백이 빼꼼하게 고개를 들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그와 나 사이의 20년이라는 간격을 그의 글은 까맣게도 매꿔 버렸다. 1889년 그가 <무림일기>라는 첫 시집을 냈을 때 나는 미운 나이를 겪고 있었고, 그의 시집과 동명인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한 1993년에 나는 처음으로 이성을 좋아해 마음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는 나이를 겪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첫 시집과 첫 영화는 내게 관심 거리가 아니었고 관심 거리였다 한들 나는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법적 나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심이 애정으로 번지는 순간 그것이 수용할 수 있는 범주는 과거로는 제한이 없어서 한국 문학에 애정을 쏟기 시작하는 순간 과거에 나온 그의 시집이며 영화는 듣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꺼리가 될 수 있었더랬다. 그런 와중에도 읽지 못했던 그의 산문을 이제야 읽는다는 것은 내 과거와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그의 추억 속에 있던 이소룡 영화들은 내게 와서 왕가위의 영화가 되었고, 그의 추억 속에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내게 와서 이소라, 이문세 최근에는 유희열까지 떠올리게 했고, 그의 추억 속의 압구정동 오렌지족은 내게 와서는 된장남녀의 향연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허수경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 것, 하릴 없이 함민복 시인의 시를 찾아 읽으며 그가 있을 바닷가 소리를 상상해 보는 것은 그와 내가 가진 공감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113페이지에 남긴 '햇빛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게 삶을 이끄는 유일한 에너지였다. 꽃들의 아우성이 있고 바람의 뭉클한 감촉이 있다.'의 감성은 내게 와서 나만의 것이 되어 봄의 감각을 느끼게 했다. 문학이란 이렇게 멋진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내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사내와 내 사이의 이런 진한 공감대를 이끌어 내다니. 역시 소설을, 시를, 수필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과는 마음을 섞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