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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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책을 기다리는 시간에 난 마조히스트가 된 기분을 느낀다. 그녀의 글들이 또 다시 내 숨통을 쥐어올 것임을 알면서도, 그 찰나들의 희열을 잊지 못해 다시 또 그녀의 글들에 목말라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그녀의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내 앞에 놓여졌을 때, 난 전에 그랬듯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녀의 글들을 만날 때의 내 의식같은 것이 된 셈이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앉은 자리를 메만진다. 일단 책을 한 번 펴면 다신 돌아갈 수 없을테고,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갈 때까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즐기게 될 것이다. 크게 숨이 쉬어졌고 책의 첫 장이 넘어갔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 언어는 존재의 시작이었고, 삶의 수단이었고, 탈출구였다. 그런 언어가 그녀를 거부하는 순간을 그녀는 받아들였다.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언어의 소멸이었기에, 다시 그것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순간을 받아들이며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에게서 소멸되고 있는 언어, 그 이전에 이미 소멸되어 죽어버린 사어. 그것이 그녀에게 다시 언어를 존재하게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빛을 잃어가는 남자를 만난다. 유전적 질병으로 인해 빛을 잃어가면서 그는 고국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래 정든 낯선 나라를 떠나 낯설지만 그리웠던 곳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는 그가 잃어가는 빛처럼 많은 사람을 잃어왔었고, 그가 붙잡을 수 없는 빛처럼 부칠 수 없는 편지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사라져가는 빛과 그녀의 사라져가는 말이 만나는 순간, 그 순간 수 많은 말들은 비어있는 공간과 비어버린 그들의 무언가를 채우기 시작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란, 이렇게 쌍방의 말이 돌지 않아도 충분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었다.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는 과학적 이론에 근거했을 때 세상 모든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완전한 소멸이란 없다. 우린 소멸되며 무언가를 창조하게 되고, 그 무언가 역시 또 다시 소멸되며 무언가를 창조하며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켜갈 것이다. 그와 그녀가 죽어가는 것들을 통해 새로운 찰나를 존재하게 한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무언가가 사라지는 과정, 그리고 그 후에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이토록 시리고도 눈부시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 애잔한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는 무언가를 버려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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