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百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일백개의 그림자, 백이라는 숫자만큼의 그림자가 있는 모양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저마다 겹치고 겹쳐져 하나의 그림자가 될테지, 그 하나의 어둠 속에서 우린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그림자가 어떤 모습일지 쉽게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 똑같은 모습이진 않을테니까. 딸깍, 딸깍, 형체는 있으되 속은 텅 빈 그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마뜨로슈까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리고 하나의 어둠 속에 있는 그림자가 일어선다. 일어서는 그림자를 무언가 누른다. 그 모습에서 百의 모양을 본다. 그리고 억울하게 억압당하는 약자의 모습도.

문장들 하나하나가 여물어 있었다. 빨갛게 여문 문장들은 고통을 받았다가 희망도 주었다가 이내 사랑도 했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름답기 보다 하나의 문장이 저마다 아름다워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경험이 아닌가 생각했다. 황정은. 이런 작가의 이름은 기억 해야 한다.

철거 당하는 건물들 속에는 그 건물의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로 느릿느릿 손님이 주문한 그 어떤 알전구도 찾아내는 오무사 할아버지의 역사도, 치매가 걸린 아버지를 데리고 다니는 수리점 아저씨의 역사도, 심지어는 그 치매걸린 할아버지의 역사까지 모든 것이 수리소 서랍 안에 빼곡히 차 있던 동전마냥 짤랑짤랑 소리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더 큰 기계음에 의해, 더 큰 자본주의의 소음에 의해 말살당했다. 그럼에도 은교와 무재는 사랑했다. 아주 조용히, 조심스레. 그렇게 조용히 사랑하다보면 그 거대한 소음이 그들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바라며 그들은 손을 잡고 나루터로 간다. 아주 조용히. 그 곳에 가면 배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다시 소음의 세계로 돌아와야곘지만 난 가만히 바라게 된다. 그 소음이 그들의 조용한 사랑을 평생 방해하지 못하기를.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책을 펴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살포시 고개를 들고 있던 내 그림자가 일어서 있었다는 것을 책을 보며 알았다. 그리고 그 나룻터에 떠도는 물길에 그림자를 가라앉혔다. 그림자가 물이 끄는 힘에 의해 수장되고 있었다. 더 일어나지 않기를, 그냥 그 힘에 끌려 그렇게 가라앉아 있기를 바랐다. 내 그림자를 끌고 가는 힘, 그것은 사실 물의 힘이 아니었고 소설의 힘이었다.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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