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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 또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 다시 문득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바람은 제법 차갑고, 마음은 더 차갑고, 기분은 더 차가운 그런 때. 그런 때가 오면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날 떠나야 하는 메리포핀스처럼 갑자기 그렇게 평소엔 읽지 않던 책을 사고 싶어질테고 길을 걸으며 바람이 넘기는 책장에 마음을 허락할 것이다. 어젠 그런 날이었다. 친구와 만나 커피를 마시다 문득 책이 사고 싶었고, 서점에선 이 책에 눈이 머물렀다. 평소엔 깊게 관심조차 주지 않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이었다. 왜냐고 묻는 데도 나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열풍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인지.내가 좋아하는 김모작가가 좋아한다는 모든 책을 읽고 싶어하면서도 왜 하루키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인지. 그런 내가 어제따라 하루키를 선택한 이유도 알 수가 없다. 그냥, 인생은 때론 그런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수 밖에. 인생에선 때론 문득 무언가가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꼭 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역에서 부터 15분 정도의 길을 걸으며, 두 단편을 읽어버렸다. 후루룩. <빵가게 재습격> 속 부부가 먹어치운 맥도날드처럼 나도 그의 단편을 읽어치우는 느낌이었다. 맛이 있었다. 글이 빅맥이 되고, 바람이 콜라가 되는 느낌이었다. 빅맥이 사라지자 코끼리가 나타났다. 코끼리가 사라질 때의 기분은, 김연수 작가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을 읽을 때의 기분이었다. 그제서야, 이 책이 오늘따라 내게 왔고 맛있게 느껴졌고 바람을 따라 책장을 넘어가는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건 '결핍'이었다. 내가 처음 하루키를 만났던 그 때가 떠올랐다. 사실 그 때가 처음은 아니지만, 난 늘 하루키하면 그 날을 처음으로 떠올린다. 그 전에 읽었던 것은 야한 하루키였지만 그 날 읽은 것이 처음으로 진정한 하루키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날도 난 무언가 허전했고 무언가 차가웠다. 아마 그런 날 내게는 하루키와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상실'과 '소멸', 그것이 주는 위안은 가득 차 있는 무언가보다 더 굉장했다고 지금의 난 생각한다. 그리고 어제도 그랬다. 한심스러운 며칠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던 와중, 이 책을 읽었고 그 때 내게도 존재하던 치명적인 사각지대에 반짝 하고 불이켜지며 다시 한 번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인정하지 않던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 찾아왔다.
왜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결핍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그토록 무섭게 여기는 것일까. 그리고는 결국, 또 다시 무언가를 잃고나서야 우리에게 있었던 허전함의 근원엔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야 마는 것일까.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어제의 내게 그 강한 상실감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그건 외로움이었을까. 모든 것이 복잡했다. 하지만 일단 알아차린 사실이 하나 존재하기에 몇 시간 전만큼 모든 것이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제, 그 답은 나 혼자 찾아야 할 몫으로 남았다. 빵가게를 습격하든, 코끼리 기사를 스크랩하든, 동생의 약혼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다른 이성을 찾든 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바람이 부는 날, 역시 이유는 모른 채 하루키의 책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