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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한다면 잊어야 한다. 그러나 잊는다 해도 온전히 잊히지는 않는 법이다. 가슴 속에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p.398)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그렇다면 나도 이 나라를 그렇게 사랑해서 그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인가.
간혹 나의 무지와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세상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고 그렇게 내 자신을 인정하고 있어도 정작 형태 없던 그것과 마주치는 순간 자신에 대한 분노는 치밀어 오른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모르는 사람일까. 덕혜옹주를 만난 순간에도 그랬다. 예전에 그녀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그것은 잠시 뿐, 관심은 망각 속에 묻혀졌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난 순간 내가 모르고 있는 시간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진 삶에 마음이 아렸다.
"달리는 말을 멈출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구나......" (p.165)
조선의 마지막 황녀, 황족의 딸로 태어났지만 그녀는 한 순간도 그것을 누리지 못했다.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고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황족 자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본은 그녀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철저히 그녀의 존재를 무시했고 그녀는 한 번도 그녀의 의지대로 살 수 없었다. 조국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여느 독립운동가 못지 않았지만 그녀의 신분은 그녀를 감시당하게 했고 구속당하게 했다. 아버지의 의문 많은 죽음, 타국에서 전해 들은 어머니의 영면은 그녀를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은 그녀의 마음에 한이 서리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늘 한 나라의 황녀로서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사람 좋던 다케유키를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조선의 황녀로서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온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그 바람을 다 견뎌내기가 힘이 들기도 한다. 옹주에게 그 바람은 너무나 거셌고 옹주는 무릎을 꿇는 대신, 등을 대고 바람을 막아내는 대신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워 버린다. 그리고 온전히 그 바람을 막아 낸다. 그녀에게 바람은 너무 늦게야 멈췄고 그 바람을 막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황녀로서의 자존심을 놓지 않았던 그녀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세월은 바뀌어 세상엔 더 이상 황족이 존재하지 않고 우린 더 이상 조국의 독립을 외친다 죽음 당하지 않으며 전쟁의 공포 속에 몸을 사리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 시절과 함께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과거까지 놓아 버렸다. 옹주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던 고국에 돌아 와 삶을 마감했지만 또 한 번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있다. 패망국의 황녀로 태어난 탓에 자신의 꿈 한 번 펼쳐보지 못했던 비운의 그녀, 이젠 우리가 그녀를 진심으로 고국으로 받아들여 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방법은 그녀를 기억하는 것, 그녀를 위해 이 나라를 지켜 가는 것.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