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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피쉬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작가의 첫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읽을 때였다. 난 그 때 작가가 자신을 벗어나서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A라는 작가가 있다. A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며 손 끝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자라났다.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었지만 단 하나, 다른 집 같은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은 받지 못했다. 이기주의, 안하무인 탓에 친구를 사귈 수 없던 A는 돈으로 사람들을 옆에 두려하나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고 어느 날 '책'이란 것에 탐닉하게 된다. 워낙에 돈이 많던 A는 하루 중 눈 떠 읽는 시간 모두를 세상의 모든 책을 읽기 위해 애쓰고 어느 날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신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책같은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그리고 그 책 속에는 가난한 자들의 삶도 포함되어 있어야 했고 A는 자신이 책으로 경험한 '가난'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써 내려간다, 라고 했을 때 A가 쓴 이 '가난'이 A의 자라온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짜 '가난'을 묘사할 수는 없는가? 뭐 이런 쓸 데 없는 생각들이었다. 그 때, 난 해이수의 첫 소설집을 읽었고 제목부터 '호주'를 떠올렸고 작가의 프로필에서 '호주'를 봤고 책을 통해 '호주'를 여행했다. 그러고 나니 새삼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난 그 책의 리뷰에 이렇게 썼다. 소설 속 배경이 모두 '호주'인 것이 아쉽고 작가가 더 많은 배경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 바람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의 대답이 그게 아니었는데, 하는 아쉬움과 작가가 첫 단편집에서 독자에게 확신시켜 준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확신에서 온 것일 수도 있었고 그 당시 현실을 도피해 이방인이 되고 싶던 내 마음을 담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내 바람처럼 작가는 두번째 단편집에서 더 넓은 세상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세상은 첫번째 단편집에서 내가 확신한 또 하나의 기대되는 작가라는 느낌에 확신을 주기 충분할만큼 멋졌다.
에베레스트, 케냐, 호주, 가상공간. 이 책에서 독자는 세계여행을 하게 된다. 한글로 된 책으로 시작한 여행은 아시아 대륙을 지나 아프리카로, 그리고 잠시 휴식-가상 공간으로, 마지막 종착지는 작가의 첫단편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대륙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그 곳을 향하고 어떤 이는 그 곳에서 그 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 행위 뒤에는 현실에 대한 '불안'이 있다. 첫번째 단편<고산병 입문>에서는 가난한 남편으로의 지위에 대한 불안, <루클라 공항>에서는 돌아갈 곳이 있는 여행자로의 지위에 대한 불안, <아웃 오브 룸비니>에서는 할육무합 해야 하는 작가와 여행자로서의 지위에 대한 불안 등. 이 들의 떠나고 돌아가는 행위 뒤에는 지위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렇다면 이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그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의 이면엔 분명 이 원인들이 자리잡고 있을 터. 나는 그들에게 이것을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떠난 뒤의 시간에 대한 불안은 없었는지. 하지만 난 이미 이 대답을 알고 있다. 어디론가 떠날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떠남 후에 올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과정들에 대해 알고 있고 그 익숙함 속에 다시 불안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지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현재 상황과는 다소 다른 종류의 것일테고 그 종류를 경험하며 잠시나마 내가 있던 현실을 잊고 싶은 것일 테다.
작가의 다른 세계 이야기도 듣고 싶다던 내가 이 단편집 중 가장 인상적으로 꼽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배경이 호주인 <젤리피쉬>와 <마른 꽃을 불에 던져 넣었다>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을 해결해주는 타인의 배려, 그들의 존재를 완벽하게 보여주진 않지만 그들의 행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배려임을 독자는 느낄 수 있기에 그 짧은 단편 속에서 싸한 여운은 오래 지속된다. 특히 표제작이기도 한 <젤리피쉬>에서 에밀리의 알 수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 작가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지만 독자는 어렴풋이 그 상황을 만들어 볼 수 있는데 독자 스스로 만들어 낸 그 상황은 말하지 않아 더 아름답고 슬프다. 이것이 해이수라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그만의 능력이다.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그려주진 않지만 그러지 않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인류 모두가 한 구석에 가지고 있을 고질적인 병에 관한 것과 결국 그것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배려라는 희망, 작가는 이 둘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의 케냐 이야기>에서 철수는 케냐에서 만년설을 보지 못해 히말라야로 떠난다. 이 장면이 책을 덮고 계속 마음에 남은 것은 앞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 줄 것이 더 많을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 나는 작가의 다음 책 역시 기다릴 것임을 대신 말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