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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어느 날, 내게 익숙한 세상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난 언젠가부터 그런 상상 속 공포에 시달리곤 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무의식적인 욕망이 만들어 낸 환각일 뿐이고 언젠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면 과연 내가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공포. 혹은 난 스스로를 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서서히 미쳐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상상. 현대의 영상 혹은 인쇄물이 만들어 낸 비실제적 체험에서 근거한 나의 망상이라고 해도 이런 생각들은 언젠가부터 머리 속 한구석을 지배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정말 활자가 되어 소설 속 사람으로 나타났다.
십년 넘게 길러온 콧수염을 아내를 놀래키기 위해 깎은 남자는 그것이 자신을 엄청난 혼돈으로 몰고 갈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 친구, 직장동료 그 누구도 남자가 콧수염을 깎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는 원래 콧수염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 뿐인가? 그의 기억 일부분은 잘못 된 것이며 그의 친구들은 존재조차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라고 하니. 남자는 점점 혼돈에 빠진다. 이것은 자신처럼 장난을 좋아하는 아내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게임인가, 아니면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려는 계략인가, 아니면 아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런 현실은 급속도로 남자의 생활을 뒤집어 놓는다.
무언가 희망적인 결말이 있을 것이라는 독자의 상상은 무너진다. 결국 남자는 자신의 콧수염을 잘랐던 면도칼로 최후의 시도를 한다. 그는 남자가 미쳤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남자와 함께 나도 혼란스럽기 시작한다. 나는 책 속 이 남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난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 남자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정말 미쳤던 것일까, 아니면 책 속 상황 자체가 하나의 거짓일 수도 있다. 혹은 작가가 독자를 희롱하기 위하여 남자의 혼란을 빙자해 독자를 어지럽히는 것일 수도 있다. 남자에 대해 그 어떤 대답을 내릴 수 없었던 것처럼 난 책에 대해서도 그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섬뜻했다. 얇은 책 속에 들어있는 엄청난 긴장감이.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내 시간이 조금은 두려웠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만난 것 기억나? 하면 우린 몇년 째 만난 적이 없어, 라는 대답을 들을까봐. 하지만 때론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금까지 지낸 시간 모두를 잊고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가 온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할까? 여전히 난 대답을 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