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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여행, 누구나 꿈꾸는 일탈.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올해 봄이었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으면서도 오롯이 혼자 있는 것에 대해선 남 모를 두려움이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임이 좋다, 혼자 걷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여행길에 늘 누군가를 함께 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그러다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완전히 낯선 곳에서 난 여행에 대해, 그리고 내 연약함을 알았다. 처음으로 '진짜' 여행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 진짜 여행은 내겐 너무나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몇달이 지난 지금, 그 시간이 그립다.
최영미 시인의 글을 좋아했다. 특히 그녀의 미술에 대한 애정과 지식은 나를 미술관으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시대의 우울>이나 <화가의 우연한 시선>을 읽으며 미술에 대한 내 관심은 나날이 깊어졌고 여행지에서 미술관은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시인에겐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시 보다 그녀의 미술 이야기에 내 감각은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여행기가 기대가 되었으며 제목 앞에 내 여행을 떠올리며 설렜었다.
하지만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라는 제목 탓인가, 이 책은 길을 잃은 것마냥 보였다. '여행'에 대해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미술'에 대해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글'에 대해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난 하나의 목적지조차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글은 좋았고 그녀의 글 속에 녹아있는 그녀만의 경험은 소중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아직 '젊어서' 그리고 천성적으로 그녀보다 더 '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내 나이와 그녀의 나이 사이의 간격 탓일까. 아니면 지나쳤던 내 기대 탓일까.
수많은 여행기가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때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난 사물에 대한 특별한 시선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 작가들의 여행기에 기대를 한다. 그들은 자신이 떠난 길 속에서 자신이 만난 풍경, 사람, 문화들에 넋을 잃고 우리도 넋을 잃게 만든다. 그들이 떼 놓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최영미 시인의 이번 책은 최근에 간 여행부터, 오래 전 여행까지를 아우르고 있고 그 순서도 여정도 일정한 틀이 없다. 제목처럼 진짜 여행을 보여주려 했던 의도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독자의 입장에선 그 어느 여행에도 완전히 참여할 수가 없었고 후반부에는 여행보다는 그림 쪽으로 시선이 옮겨가며 그녀가 냈던 미술기에서 이미 만난 것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전반적으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물론 여행이라는 것은 일정한 룰이 없다. 내가 세웠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지도 않다. 몇 번이고 그 계획이 엉망으로 돌아가며 진짜 여행을 배우고 일상에서 강한 모습으로 무장하고 있던 내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래도 이야기를 따라가며 떠나는 여행은 조금 단정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실제로 밟지 못했던 길, 혹은 내가 밟았던 길을 글로 만나는 즐거움은 여행의 그런 고됨이 담겨있어도 나를 완전히 책 속에 파묻히게 할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내겐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내게 가르치는 바는 있다. 난 이 책 속에서 그 모든 여행은 책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여건이 된다면 내 스스로 내 발로 걸어야 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렇다면 이런 여행기를 읽으며 온 실망은 어쩌면 내가 조금 자랐다는 말이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