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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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을 덮었을 때, 그 뚫린 마음 한 구석으로 바람이 불었다. 북풍인지 서풍인지, 풍향계 없이 그런 것을 내가 어찌알까. 하지만 책을 본 후엔 왠지 그 바람이 북풍일 것만 같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메일함을 열었다. 습관처럼 누르는 수신확인. 그 사람은 내 메일을 읽지 않았다. 물론 답이 있을리도 없다. 책의 마지막 장을 연다. 마지막 이메일, Aw: 주의, 변경된 이메일 주소입니다. 보내신 주소에서 수신자가 메일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전달된 새 이메일들은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시스템 관리자에게 문의하십시오. 차라리 이런 친절한 메시지가 낫겠다. 수신확인란의 확인 안함 메시지 보다는.

 

     내게도 바람이 불었다. 닫혀있던 문이 오래 되어 헐거워진 조임새 사이로 슬쩍, 바람이 그렇게 들어왔다. 그 바람은 내게 브라질에서 발생한 나비의 날개짓 같았다. 물론 처음엔 그것이 토네이도가 될 것이라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늘 공격에 대한 예비만 해 왔던 터라 일이 터진 후의 방어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결국은 그 날개짓에 닫혀있던 문이 무너져 버렸으니까.

     단 한줄의 묘사나 설명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E-mail로만 되어 있는 이 책을 단순히 달달한 사랑얘기로만 착각한 것도 잘못이었다. 무너져 내린 문으로 바람은 빠져나가는데 그것을 잡을 수 없던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래, 결국은 그들은 잘 될 거야, 라고 믿은 것도 잘못이었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랑 얘기에 다 똑같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도 문학 속 사랑은 결국 해피엔딩,이라고 아직도 믿었던 건가. 아니, 바랐던 것일게다. 그들이 행복하길, 그리고 잠시 그 행복한 사랑 속에서 나도 바람을 피해보길.

 

     E-mail은 기존에 존재하던 편지의 형식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전자기계가 전하는 메시지가 어떻게 달콤할 수 있고 어떻게 애탈 수 있냐며 아날로그로의 귀환을 꿈꾸는 자들은 말했다. 물론 그들 역시 전자기계의 힘을 빌어 말했다. 하지만 그 전자기계는 수많은 우연을 만들어내고 그 우연은 만남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책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한 통의 이메일은 한 번의 키스를 보내는 것이라고. 그들은 몇번이고 키스를 나눈다.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키스지만 그들은 내내 두근거렸고 행복했다.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더 뜨거운 결말을 맺기를 바라는 것은 행복에 익숙한 사람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그 바람이 어떻든 그들은 그들만의 키스를 지속시키고 마무리할 권리가 있었다. 비록 그들이 허구의 인물이었을지라도.

 

     책의 끝 부분에서 여주인공이 말한다. Re: 지나간 시절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시절이고, 새로운 시절은 지나간 시절과 같을 수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쇠잔해요.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 되죠.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늙고 불행한 사람이에요. 난 지금 늙고 쇠잔하고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이 판명났다. 하지만 젊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엔 아직 바람이 지나가지 않았다. 여주인공 에미에게 묻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바람은 지나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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