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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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밤, 내 인생의 책들을 꼽아봤다. 내 기억 속에 너무나 반짝거리며 꽂혀있는 책들을 떠올리며 내 시간을 되짚었었다. 그 땐 몰랐다. 단 하루만에 또 한권의 잊지 못할 책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난 영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 시제로 쓰는 것이 옳다. 아마도 이젠 좋아질 것 같으니까.) 전공으로 선택을 했으면서도 영문학은 달갑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덜 섬세한 것 같았고 왠지 모르게 덜 감상적인 것 같았다. 난 섬세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들이 좋다. 난 미국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 역시 과거 시제로 쓰는 것이 옳다.) 이유는 딱히 없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내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드라이브 코스로는 아주 제격인 길고 긴 시골길도, 바라만 봐도 넋이 나갈 것 같은 불빛을 뿜어대는 라스베거스도, 화려하고 다채로운 뉴욕도 그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난, 센트럴파크에 누워 이 책을 읽으며 날 끌어당기는 수많은 손을 느껴보고 싶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는 충격에 휩쌓였다. 비행기가 건물을 통과했고 건물이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사건에 기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그 사건으로 아빠를 잃은 오스카는 아빠를 찾고 싶다. 그것이 아빠를 잊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오스카가 아빠를 놓지 못한 것은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듣지 못한 그 한마디, '사랑해'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린 늘 얼마나 많은 말들을 머뭇거리다 놓치고 마는 걸까, 하지 않아도 좋은 말들, 걸러도 좋은 말들은 기여코 뱉어낸 후 주워담지 못해 후회하면서 해야 할 말들은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잊게 되는 걸까. 그 말들을 다 모아 담을 수 있는 언어저장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단지 한 소년의 홀로서기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9.11 테러 이전의 2차 세계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11은 단지 한 순간의 일은 아니다. 그건 그 순간 이전의 모든 순간을 안고 있는 한 순간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순간이 바로 이 순간에 달려있어. 전 세계 역사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어.(p.322)

     그리고 그 과거의 순간엔 오스카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고 오스카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첫사랑이 있고 오스카의 할머니가 있고 오스카 할머니의 아버지가 있다. 오스카 역시 이전 모든 순간을 안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말하지 못한, 세월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그들은 미래를 믿고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잃어버린 후에야 그리워하며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의 귀는 예전에도 두개였고 지금도 두개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의 말에 무심하고 필요한 말을 아낀다면 언젠가 우리의 귀는 사라지고 우리의 언어도 소멸하지 않을까. 우린 점점 말하는 법을 잊게 되고, 나중엔 토마스처럼 산더미 같은 공책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지 못한 말들의 무덤...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아이에게 쓴 편지의 무덤. 그 속에서 우린 대답 없는 물음을 계속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몇시입니까? 미안합니다. 도와주세요.


     책은 엄청나게 아름답고 믿을 수 없게 슬프다. 끝을 바라보며 밝혀지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강렬한 반전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무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책을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 코 끝이 찡해지고 몇 번을 고개를 들어 눈을 깜박깜박 거려야 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마치 센트럴 파크에 누워 맨하튼 쪽으로 끌어당겨지며 꿈으로 새겨진 모자이크를 더듬는 기분이었다. 정말,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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