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덮으며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를 알았다, 라고 생각한 것은 내 성급하고 어리석은 자만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작은, 진행 중인 그의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의 책에선 죽음, 그것은 어둡고 음침한 색이 아니라 매혹적이고 몽환적인 색이 되어 간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야기 한다.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환타지'라고 여겨지던 이 소설의 내용이 이제 실제가 되어가고 있다고. 그렇다.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지을 수 있는 '자살'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너무나 가까운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대중매체에서는 인터넷으로 자살 카페를 만들어 자살을 교사하거나 돕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한 땐 허구적이었던 책 속 자살도우미가 실제로 우리 삶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담 지금의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고 자살은 10년 전 그것보다 가벼워 진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 가벼울 수 있고, 그 누구의 삶이 특별히 무거울 수 있단 말인가. 난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생각나곤 한다. 어찌 사람의 존재를 무게로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책 속 자살도우미는 죽음을 도와줄 사람을 선택하고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는 여행을 떠나 자신의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내려간다. 하나의 삶이 자신의 의지로 완성되고 그것은 하나의 예술처럼 남는다. 그 묘한 관계는 책 속 텍스트와 책 속에서 묘사되는 세 그림인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의 절묘한 만남과도 닮았다.
현대인은 우울하다. '소외'라는 단어가 현대인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것은 그들이 철저히 혼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지만 혼자 있는 순간 지독한 고독을 경험하게 된다. 알아가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많지만 그 속에 깊이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책 속의 인물들 K, C, 유디트, 미미 역시 우리의 모습이다. 그들은 얼마나 외로운 사람들인가. C는 말한다. 서른이 넘으면 사랑도 재능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모두는 사랑에 재능이 없었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섹스를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고 서로를 탐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알려 하지 않는 그들 사랑은 진정성이 결여된 껍데기일 뿐이었다. 알맹이 없는 추상성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책은 거칠고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왕가위의 90년대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의 세상은 조금 더 구체적이고 낯익을지라도 이 거친 허구의 세계를 보고 있자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 세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C가 화면과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느끼듯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