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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태어나서 단 한해도 여름 감기를 걸러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얼마 안돼 폐렴으로 생사를 헤맸다던 아이는 올해 스물 여섯살이 됐다. 그리고 스물 여섯살이 된 아이는 또 다시 감기로 식은땀을 흘린다. 몇년 전부터 아이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열과 식은땀으로 끙끙 거리면서도 그 기운에 읽는 책맛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맥없는 정신으로 몽롱하게 읽는 글맛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어쩌면 여름 감기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올해는 조금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겨울 이불을 뒤집어쓴 여름 감기의 어느 날, 제목도 자기같은 <감기>를 펼쳐들었다.
윤성희의 소설은 읽기에 쉽지가 않다. 아니, 읽기는 쉬우나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다소 힘이 들다. 하지만 우리가 늘 소설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기를 바랐던가. 소설의 목적을 때론 '즐기기 위한 것'에 놓아둘 필요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즐기기에 윤성희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러나 그 재미가 유쾌나 웃음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단편들마다 우리에게 무언가 상징적인 것을 제시하며 그것이 얘기하는 것을 독자 나름대로 그려가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비극은 유전된다. 개인의 비극은 개인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 팔자 닮는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자식에게 전수된다. 그리고 이런 시간의 흐름은 우리가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늘 시간은 무언가 우연적인 것을 우리 삶에 가져다 놓고 그 삶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기도, 또는 놀랄만한 인연이 숨어있기도 하다.(「구멍」,「이어달리기」)
또한 소설 속엔 반전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이끌던 이가 사실은 귀신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하고, 함께 놀이동산에서 놀던 친구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며 자신 옆에 아무도 없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이런 결말은 독자를 놀랍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없이 고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은 無와 有가 공존할 수 밖에 없는, 혹은 有 속엔 늘 無가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까닭이다. (「하다 만 말」, 「안녕, 물고기 자리!」)
텍스트 속에 있는 다양한 코드들은 독자들이 자기 나름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고 정립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윤성희 소설 속의 재미는 단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비극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다. 그래서 우린 단지 이 재미를 웃음으로 넘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장은 명쾌하고 가볍다. 어렵지 않게, 힘들게 않게 읽어나가며 소설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 다양한 코드들이 있는만큼, 작가의 상상력은 빛을 낸다. 독자는 그 빛 속에서 행복한 책 읽기를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