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까. 내게 전경린의 소설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좋아하는 작가에 그녀 이름을 포함시킨다는 등의 선호도와는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목록에는 전경린이라는 이름이 없지만 전경린의 소설은 내게 너무도 특별하다. 그것은 어쩌면 '인연'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힘이 들 때면 혹은 아파할 때면 전경린의 소설은 말 없이 내게 다가와 있었다. 벌써 그런 만남이 몇 번째. 난 그 때마다 전경린의 소설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와는 너무 다른 20대의 삶에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동질감에 몸을 떨어야 한다. 분명 전경린의 소설 속 20대의 삶은 나의 그것과는 지나치게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소설 속의 20대들은 나와 달리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있고 그 성찰이 현실에서 자아를 괴리시키며 그 괴리감에 삶에 환멸을 느끼고 긴 방황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 20대 들은 깊고 깊은 바다를 헤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난 발목도 다 담글 수 없는 얕으막한 개울가에 앉아 이 물들이 차 올라 내 몸을 적셔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얕은 성찰도 이루지 못한 20대 그것도 중반의 나이에 서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전경린의 소설 속 20대와 나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뛰어 넘어 만나 어쩌면 그 소설들이 그려내고 있는 단어와 이미지 속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유리로 만든 배(전경린, 생각의 나무, 2005)와 닮아있다. 그 책 속 주인공의 은령처럼 이 책의 주인공 수련도 20대의 삶에서 환멸을 느끼고 방황을 하고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우리가 꿈꾸는 20대의 타오를 듯한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피의 의식처럼 끈적하고 깊지만 주인공들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유로 이끌게 된다. 어쩌면 사랑이 아닌 열병일지도 모를 그 뜨거움이 지나간 후에 그들은 오롯이 하나의 존재로서 뿌리를 내려간다. 자신이고 싶었던, 혹은 자신이 아니길 바랐던 그 시간은 결국 멈추지 않고 흐르고 흘러 흐름의 흔적을 남긴 채 그들의 속을 채워 나갔다. 그래서 전경린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나의 지금에 대한 환멸이 일종의 안쓰러움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면 난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 시기를 삶으로 끌고 가서는 안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끝엔 언젠가 나를 깨울 아침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조금씩 내 발을 적시고 있는 개울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뭔가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대한 갈증. 난 그것에 시달리며 우울하고 아픈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전경린의 책은 나의 그런 날 속에 들어 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제안한다. 그래서 난 전경린의 소설을 만날 때면 다시 내가 그런 시기를 겪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언지도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방황하다가 단어, 그리고 이미지로 무언가 나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내겐 전경린의 소설이 끔찍할만큼 특별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