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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어렸을 때부터 난 글짓기 숙제를 할 때면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 어려움이 날 찾아오는 건 내용을 풀어내는 과정이 아닌 제목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는데 내용은 다 완성시켜 놓고도 제목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어떻게 몇 글자 안에 내가 할 얘기들을 압축하라는 말인가, 그것도 매력적이고 근사하게. 제목은 짧아야 한다는 편견이 날 오랫동안 괴롭혀 오던 어느 날, 난 그 노래를 들었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그래, 제목은 꼭 짧을 필요는 없는 거야. 그 후로 난 지금까지도 긴 제목에 매력을 느낀다. 고등학교 땐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시집의 제목을 말하며 로맨틱을 외쳤고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라는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땐 어떻게든 그 영화를 봐야겠다며 난리를 쳐댔다. 그런 내가 또 한 번 꽤 매력적인 제목에 압도 당하고 말았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이지민,문학동네,2008)이 바로 그 책이다. 내 귀에 생경한 작가 이름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마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목이 주는 매력과 문학동네에서 출간하는 한국소설에 대한 믿음은 이 책을 넘기게 했다.
이 책에 수록 된 아홉개의 단편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말한다. 단편집을 보다보면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특색있게 매력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동일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는데, 이는 굳이 뒤에 '해설'까지 가지 않아도 어느정도 느낄 수가 있다. 이 책의 코드를 눈치채게 되는 것은 성형중독 미미씨의 일화를 담은 '대천사'부터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다 삶의 변화를 원한다. 표제작인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의 선숙 역시 마찬가지이다. 카프카 처럼 매력적이지만 나쁜놈을 사랑해 버린 것도 인정, 자신이 궁상맞게 그 남자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도 인정, 하지만 선숙은 쿨 할수 없다. 쿨하고 싶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보통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며 자신을 위로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갈망하지 않았던가. 선숙은 사실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집으로 가는 길은 으레 지치기 마련(p.26)이지만 우린 끊임없이 집으로 가야하듯 그 남자 역시 자신을 밀어내는 듯 해도 또 다시 자신과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선숙은 믿고 있었던 것일 게다. 그러다 문득, 그 남자의 길 위에 자신이 없다는 걸 느끼는 순간 선숙은 쿨해진다. 그녀는 변화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모든 변화가 선숙처럼 쿨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대천사'나 '오늘의 커피' 혹은 '불륜 세일즈'처럼 갈망하는 변화 속에서 결국은 모든 것이 허망해 보이는 다소 가슴이 무거워지는 단편도 있다. 그들의 그런 바람 안에서 '영혼 세일즈'의 선재의 다짐은 응원해 주고 싶기까지 하다. 허나 이런 변화도 외부의 영향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 우리가 존재 하나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책을 덮으며 알았다. 이지민이란 작가는 낯설지만 이지형이란 작가는 들어봤음직 하다고. 그리고 기대할만한 또 다른 작가를 만났다는 것을. 책을 딱 두장 읽었을 때 나쁜 놈과 그 나쁜 놈의 손에 대한 묘사가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놈이 나쁜 놈이지. 그래, 그런 나쁜 놈이 꼭 손이 그렇게 생겼어. 괜히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왠지 가벼운 사랑이야기가 되지 않을까란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였던 셈이다. 분명 단편이 지니고 있는 소재는 이미 많이 닳고 닳아 식상하기까지 한 것이다. 성형중독이나 불륜, 원조교제 등. 하지만 그 소재들을 풀어가는 작가의 재주는 신선했고 남달랐다. 마치 매일 달라지는 스타벅스의 '오늘의 커피'를 9일 동안 마시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 권의 재미있는 책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재미란 단지 오락적인 요소만이 아닌 심적 충만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더 즐겁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가를 알게 된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변화'를 말한 이지민이란 작가의 앞으로의 '변화'를 즐겁게 기다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