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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상자가 아니야 - 2007년 닥터 수스 상 수상작 ㅣ 베틀북 그림책 89
앙트아네트 포티스 글 그림, 김정희 옮김 / 베틀북 / 2007년 9월
평점 :
아기토끼야, 상자 안에서 뭐해?
이건 상자가 아니야! 상자가 아니라구!
어렸을 땐 왜 그랬잖아요, 작은 것 하나에 너무너무 신났잖아요. 내 한 몸 들어갈 상자만 있으면 그건 집도 됐었고, 자동차도 됐었고 작은 동산도 됐었잖아요. 어른들한텐 단지 상자였던 그 조그만 종이가 내겐 얼마나 큰 상상도구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살짝 웃음도 나면서 그립고 그러잖아요.
내게 작은 상자가 생긴다면 지금은 어떻게 할까요? 착착 접어 재활용박스에 척 넣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그 박스를 들고 들어가고 올라가고 씨름을 한다면 아이들 몰래 치워버릴지도 몰라요. 집이 지저분해진다고요. 하지만 우리도 그랬잖아요 그 땐.
사실 더 많은 것들이 될 수 있었어요. 그 상자는 집이었고 차였고 동산이었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이 될 수 있었을 거에요. 날 로보트로 만들어줄 수도 있었을테고 비행기가 될 수도 있었을테고 내 책을 정리해두는 정리함이 될 수도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어쩌면 그 모두였을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에겐 잘 기억나진 않지만.
조금 오래 된 얘기이긴 하지만 한 개그맨이 사물흉내개그라는 걸 했던 것, 기억 나요? 난 그 사람이 매우 똑똑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그 사람은 우리가 사물을 가지고 온갖 것을 표현하려 했던 것 처럼 우리의 몸을 가지고 온갖 사물을 흉내내려 했었어요. 난 웃으면서도 그 사람의 기발한 생각에 무릎을 쳤더랬죠. 어쩌면 그 사람은 어렸을 때 꽤나 장난꾸러기라서 작은 상자 하나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떠올렸을 수도 있죠. 그런 친구와 놀았다면 내 어린 시절이 좀 더 유쾌해 졌을 것 같기도 해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손을 움직이는 것이 두뇌 개발에 좋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좋은 재료, 비싼 재료로 놀게끔 하려고 하죠. 하지만 이렇게 작은 상자 하나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것, 그게 정말 재미있는 놀이이자 개발 학습이 아닐까요? 우리 어린 시절엔 정말 그런 것에 행복하지 않았나요?
어른이 되어가며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자주 날 슬프게 해요. 하지만 난 이 책을 보며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작은 충만감을 다시 한 번 깨우칠 수 있었어요. 어른이 되어 만나는 그림책은 참 행복해요. 현실의 고된 마음을 잠시 지나간 시간으로 여행시켜 주거든요.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며 당장 옆에 있는 작은 소품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요? 상자에 들어가 함께 뒹굴며 더 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 주는 건 어떨까요? 그 어떤 비싼 장난감보다, 어떤 좋은 장난감보다 훨씬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에요.
말했잖아요. 이건 상자가 아니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