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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ㅣ 랜덤소설선 13
박범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숨에 몰아쳐 읽어내야 할 책이 있다면 마음에 쉬는 시간을 적당히 허용해 가며 만나야 할 책이 있다. 내게 이 책은 후자이다. 한 순간 뜨거워지다 한 순간 얼음장 같아지는 이 책을 단숨에 읽는다면 그 온도차이에 난 견디지 못하고 갈라졌을 것이다. 책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라는 게 존재함을 굳건히 믿는 내게, 이 책은 여름의 시작과 함께 인연이었고 이 책을 만나는 내내 여름의 열기보다 더 뜨겁고 힘들게 나를 이끌었다.
2주에 걸쳐 이 책을 만나면서도 난 이 책이 내게 주는 이런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피고름을 먹어대는 거북한 성적 묘사 탓을 하다가 이 책이 전반적으로 안고 있는 그 불온한 색채의 탓도 했다. 또 자신의 '자유'를 찾아 남의 '시간'을 밟아버린 주인공의 무책임함을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그 불편함의 근원을 난 또렷이 보았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던 '죽음'에의 '공포'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생'을 시작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우리에게 '죽음'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보편적인 감정을 신랄하게, 하지만 극복하고 싶은 소망을 담아 묵묵히 그려나간다. 아이러니 하다. 책 속 천예린과 김진영, 둘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지독한 기록이다.
50대, 주류 회사의 재무이사까지 올라 나름대로 자수성가의 대표격이었던 한 남자에게 바람이 분다. 천예린이라는 한 시인의 출연은 그동안 이 남자가 쌓아왔던 '반듯한 가장'의 교과서적 정의를 하나하나 지우게 만든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간다. 그리고 죽음과의 지독한 싸움은 시작된다. 몸에 죽음을 안고 사는 천예린을 찾아 여행을 하며, 그는 자신에게서 벗어났고 자유를 찾았으며 유랑을 얻었다. 그런 자유와 해탈의 경지에서 그는 다시 천예린을 만났으며 천예린을 안았으며 천예린을 묻었다. 그는 생의 문을 열고 감옥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는 더욱 견고하게 생의 문을 닫고 더 깊은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자유를 찾고 유랑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답답했다. 그리고 4천7백 미터가 넘는 얼음의 앞에서 알게 된다. 자신이 믿었던 자유, 유랑의 중심은 아무 것도 있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것을. 죽음에 다가갔고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이란 본래 외로운 존재이듯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알기 위해선 여전히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맞게 될 죽음을 선택한다. 자신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을 연결시키길 바라면서.
지독히 외롭고 외로웠다. 책을 읽는 것은 가장 개인적인 행위이며 이기적인 행위라고 나는 그렇게 말한다. 내 시간, 내 공간에 다른 이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채 온전히 책에 나를 맡기는 것이 독서이기에 책을 읽는 것은 가장 사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의 가장 사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죽음을 만났을 때는 정말 지독히 외로웠다. 책을 읽고 있는 나도 혼자였으며 김진영을 따라 내 죽음을 보는 나도 혼자였다.
역사의 한 왕은 불멸의 약을 찾아 헤매다 죽음을 맞이했고, 인류는 아직도 무병장수를 꿈꾸며 의학을 발전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은 온다. '영원'을 꿈꾸지만 '영원'을 만난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죽음 후 불멸을 꿈꾼다. 그렇게 우리는 후손을 낳고 예술을 남긴다. 모두가 우리의 발버둥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김진영은 천예린이 숨겨놓은 죽음에 대한 반역에 적개심을 느끼며 천예린의 시집을 발로 밟는다. 그리고 나 역시, 김진영과 동시에 이 책을 발로 밟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2천 6백매나 되는 긴 소설을 7년 후에 1천 5백여 매로 깎아냈다고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주름의 시간'을 극복했다고 했다. 어쩌면 이 책이 줄여지기 전에 출판 된 책을 만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이 책을 만나는 힘든 여정 속에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가만의 죽음에 대한 반역을 살짝 눈치 챈 지금은 이 책만으로 충분히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나 역시 '주름의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인 시간을 갖겠다. 더 이상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며 유사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은 두고두고 만나고 싶은 책이지만, 자주 만나고 싶지는 않다. '주름의 시간'을 극복할만한 시간이 흐르고 그 '극복'의 순간이 온다면 그 때 다시 이 책을 만나며 내가 건너 온 '주름'의 강을 박범신과 나눠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