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낯선 것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내동댕이치며,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나에 의해 열려진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약해빠진 햇빛이 누가 보고 있건 보지 않건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먼지들 사이를 유영했다. 바닥이 꺼진, 아니, 더 정확하게는 마루가 꺼진 은신처, 거기에는 아무런 특별한 것도 없이, 어둡고 담담하고 메마르기만 했다. 나는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은신처라는 뜻에 맞게 그곳에 내 몸을 숨겼어야 했는데,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고 믿어지는 무언가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려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마루가 꺼져 있었으므로. 너무 늦었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오히려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기, 마루가 꺼진 은신처 앞에 서 있는 내 뒤통수를 향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서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 안에서는 먼지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알전구마냥 번쩍댔고, 나는 비스듬히 열린 문 앞에서 낙담하는 대신, 느긋한 마음으로 달리기 코스의 디테일을 추억하며, 한 번도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꼭 오고야 말 것으로 여겨지는, 한편으로는 문을 열기 직전까지는, 그리고 은신처의 마루가 꺼졌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피하려고만 했던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향해 전언을 날리기를 기다렸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이치은, 알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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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발표된, 가장 아방가르드한 국산 밴드 어어부(漁魚父) 프로젝트 사운드의 혁명적인, 하지만 대중들의 철저한 무시를 받았던 2집 더블 앨범 「개, 럭키스타」의 열다섯 번째 싱글의 제목은 「마루가 꺼진 은신처」이다. 지옥에라도 들고 가고 싶은 훌륭한 앨범이다. 이때만 해도 ‘저자’라는 별명 뒤에 숨어 있었던 백현진이 썼다는 가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평상시처럼 너는 걸어간다
웅성대는 사고현장을 가로질러
붉은 색 도로 위에 흰 드레스
맨홀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온전한 곳을 기대할 수 없는
너는 설마하면서
피해보려고 할 때 니 심장에
정확히 관통된다
반복돼.

아침 유리창은 녹아내린다
피투성이 이웃의 도움 요청 소리
반복되는 초시계 박동에 놀라
현금수송 차량은 개를 또 짓이기고

너는 재빠른 총총걸음으로
막다른 골목을 향해
네 몸을 숨기려고 문을 열면
마루가 꺼진 은신처
반복돼

너는 이제 초조하다
너는 진작 초조했다
너는 도처에 있었다
너는 다 알고 있었다
반복돼

「선고/자백」의 충격적인 시작도 놀랍고 「하수구」의 노곤함도 좋고 「어항 속의 다방」도 흥겹고 「수사반장」도 혁신적이지만, 이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고르라면 이 노래를 고르겠다.

나는 처음 이 소설을 쓰기 전에 한동안 이 소설의 제목을 『불화의 소멸』로 할 것인지, 『마루가 꺼진 은신처』로 할 것인지 고민했었다. 누추한 소설의 제목으로 자신의 노래 제목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백현진 님에게 감사드린다.

2018년 11월
이치은

<마루가 꺼진 은신처>의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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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 때문에 행복해하는지 알 수 없다.
― 플리니우스

나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타인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 그 둘 사이에서 문 씨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거 재미있겠네요. 다른 사람의 시간으로 하죠. 그런데…… 미리 그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메뉴판 같은 게 있나요?”
―단편 「전당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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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시종이 있어. 지금 벌을 받아서 감옥에 갇혀 있지. 재판은 다음주
수요일에나 열릴 거야. 당연히 범죄는 가장 나중에 저질러지지 .
―루이스 캐롤


저희의 혈관에는 속속들이 죄책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죄책감은 형제님의 말처럼 죄보다 어쩌면 더 오래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죄책감은 우리의 약함을 보여주는 징표이고, 해서 우리는 주제넘게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죄와 우리의 기도가 가진 아주 작은 힘과 그와 대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함뿐입니다.
―단편 「고해성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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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러자 모두 자연스러워졌다. 강대형. 낯설고 조금씩 어긋나 있다고 불평했던 모든 게 그제야 죄 수긍이 갔다. 아무것도 어긋나 있지 않았다. 시간 속에 잘못 놓여 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 희망이 없다는 장담은 어리석었다. 강대형, 그게 내 이름이었다. 아니, 내 이름이다, 여기 이 마을에서.
―단편 「바리케이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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