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 요약문
좋은 삶을 위한 선언: 부엔 비비르(El Buen Vivir)의 길
지금, 우리는 새로운 대화가 필요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더 가깝게 끌어당기며, 현재를 넓히고 확장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출발점을 공유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존재들입니다.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희생당했지만, 저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존엄을 가지고 있으며,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자, 땅과 물, 조상과 미래 세대를 잇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현실
우리는 일자리, 땅, 가족, 깨끗한 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이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연대하며, 이러한 두려움을 바꿔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는 존엄한 삶을 원합니다. 사회적 해방, 21세기 사회주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 식량 주권, 연대 경제, 생태 사회주의 등 다양한 목표를 향해 가지만, 공통된 것은 단 하나, 잘 사는 삶을 위한 투쟁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장애물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불평등한 권력구조이며,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것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행동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와 사상을 가지지만, 번역하고 소통하며 함께 나아갑니다. 민주주의, 인권, 철학, 대학, 시민사회 같은 기존의 개념들을 새롭게 해석하며, 기존 체제의 틀을 넘어선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교육과 지식
우리가 가진 지식은 학문적 자격증이 아니라, 몸과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제된 대학과 지식 시스템을 해체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실용적이고 직관적이며, 우리의 경험과 투쟁 속에서 진화합니다.
우리의 무기와 희망
우리는 생명을 위한 무기를 사용하며, 죽음을 위한 무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무기는 민주주의, 인권, 연대, 그리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입니다. 우리는 기쁨 속에서 저항하며, 삶의 예술을 만들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서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억압받는 자로 남지 않기 위해, 존엄한 삶을 위한 선언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는 부엔 비비르(Buen Vivir)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에서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
이제 대화를 바꿀 때가 되었다. 과거는 더 넓게 열어두되 거기에 덜 얽매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미래는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재를, 그리고 세계의 공간을 확장해 나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투박한 지도를 들고 여행을 떠나자. 이론과 행동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을 수 있으나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같은 장소에 도달하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알아볼 만한 어떤 장소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출발점을 공유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모두 같은 주소로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함께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중 소수는 식민지 언어를 말하고, 대다수는 다른 언어들을 말한다. 우리 중 오직 소수만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복화술사들에게 의지한다. 우리는 그들을 후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 늘 잘해 왔던 것, 즉 뒤돌아보는 일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우리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 중 뒤처진 이들을 돌보아 다시 투쟁으로 이끌고 누가 뒤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배신하는지 밝혀내 우리가 그 이유를 알아내도록 돕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우리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우리는 마르크스를 안다. 거대이론은 굶주린 이들을 위한 요리책이다. 우리는 보편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모든 철학을 폐기한다. 우리는 간디(Mahatma Gandhi)를 알고 간디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파농을 알고 파농은 우리를 안다. 우리는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알고 투생 루베르튀르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를 알고 파트리스 루뭄바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바르톨리나 시사(Bartolina Sisa)를 알고 바르톨리나 시사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카타리나 에우페미아(Catarina Eufémia)를 알고 카타리나 에우페미아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로자 파크스(Rosa Parks)를 로자 파크스는 우리를 안다. 그러나 우리를 아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류 없는 혁명가들이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상들을 인증하는 데 전문화된 공인된 지식인들이 많다는 말을 들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선의 이쪽 편에 있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대학이라 부르는 접근 불가능한 동네들과 요새화된 기관들 안에 거주한다. 그들은 박식한 방종가들이며 면책특권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글로벌 사우스, 즉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것들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satellite-oppressions)의 무한한 탐욕에 희생되어 온 창조물들과 피조물들의 거대한 집합이다. 우리는 모든 방위에 존재한다. 우리의 지리는 곧 부정의와 억압의 지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를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는 희생에 순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항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원주민들이다. 우리에게 주인, 지배자, 또는 관리자가 있기 전부터 우리가 원래부터 항상 있었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혹은 우리의 의지에 반해 옮겨진 곳에, 그리고 우리에게 주인과 지배자, 또는 관리자가 군림하게 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관리자를 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관리자를 두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강요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두려움 없는 우리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저항한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들은 서구의 세계 이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된 매우 다양한 인간들이다. 우리는 세계의 변혁이 글로벌 노스(global North)가 예견하지 못한 방식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이고, 생물 다양성과 물이며, 대지와 파차마마이고, 조상과 미래 세대이다. 우리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보다 뉴스에 덜 등장하지만, 그 고통은 인간의 고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록 인간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중 가장 운 좋은 이들은 오늘 살아 있지만 내일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먹을 음식이 있지만 내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오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경작하지만 내일 몰수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거리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일은 오직 폐허만 남을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가족을 돌보지만 내일 강간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일자리가 있지만 내일 해고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인간이지만 내일은 동물처럼 취급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깨끗한 물을 마시고 원시림을 즐기지만 내일은 물도 없고 숲도 없을까 두려워한다. 우리 중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들이 이미 오래전에 현실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우리 중 일부는 2000년대의 첫 10년 동안 열린 세계사회포럼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참여자들과 연대한다. 비록 참여자들이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더구나 가장 중요한 것들조차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가 그들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에 대해 그들보다 더 잘 생각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는 항공모함 같은 생각(aircraft-carrier-ideas)에 연과 같은 생각(kite-ideas)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만큼 대담하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비록 항공모함은 항공모함이고 연은 연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중 일부가 2000년대 두 번째 10년의 시작에 카이로와 튀니스, 마드리드와 아테네, 뉴욕과 요하네스버그의 거리에서, 한마디로 부유한 나라들이 단지 부유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것(반면 99%의 가난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1%의 초부유층 가문들에게 속하는 신봉건적 요새의 바깥에서 산다는 것)이 밝혀진 세계의 거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입증해 온 것이다. 비존엄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선 저편에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들과 연대를 형성해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중 일부는 사회적 해방을 향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21세기 사회주의, 부엔 비비르 사회주의를, 또 다른 이들은 공산주의를, 다른 이들은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 또는 수막 카마냐(sumak qamaña)를, 다른 이들은 파차마마(pachamama) 또는 움마(umma)를, 또 다른 이들은 우분투(ubuntu)를, 또 다른 이들은 인권을, 또 다른 이들은 실질적이고 참된 민주주의를, 또 다른 이들은 존엄과 존중을, 다른 이들은 복수국민성을, 또 다른 이들은 상호문화성을,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정의를, 또 다른 이들은 스와데시(swadeshi)를, 또 다른 이들은 데모카라시(demokaraasi)를, 또 다른 이들은 민쭈(minzhu)를, 또 다른 이들은 식량 주권을, 또 다른 이들은 연대경제를, 또 다른 이들은 생태사회주의, 그리고 대형 댐과 메가프로젝트에 맞선 반대 투쟁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개념은 개념적 괴물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경고를 받아 왔다.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존엄하게 살기 위해서는, 즉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수많은 장애물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장애물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서로 가족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지식의 단일문화, 진보의 선형적 시간관, 자연화된 불평등, 지배적인 척도,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생산주의가 그것이다. 존엄한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극소수의 이익을 부당하게 대변하며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차이들의 무한한 축적이다. 우리는 지상의 빼앗긴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지하고 열등하고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후진적이고 비생산적이거나 게으르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겪는 측량할 수 없는 고통과 그것이 초래하는 세계 경험의 소외는 부당하지만, 그것들은 역사적 숙명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제거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에 맞서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목표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행동과 감정의 질에 더 많이 달려 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세계는 우리 자신과 어머니 대지, 이 모두와 관하여 잘 살 수 있는 기회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 기회들을 활용할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을 더 잘 안다. 그들 스스로가 ‘선의 이쪽’이라고 부르는 곳에 사는 자들은 우리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우리 중 가장 운이 좋은 이들을 위해, 그들은 우리의 마을에서 수많은 바자회와 상담 부스가 있는 박람회를 조직한다. 그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 성경책, 지식재산권, 공인 컨설턴트, 역량 강화 처방전, 구조조정, 인권, 사유재산, 잘 포장된 민주주의, 병에 든 생수, 그리고 환경과 관련한 우려를 전시대에 올려놓는다. 우리는 한때 소크라테스가 광장을 거닐면서 많은 호화로운 상품들을 보고 “세상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오늘날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을 통해 언급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말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선의 저쪽에 있는 자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선을 없애기를 원한다.
우리는 어디에 사는가? 우리는 치아파스에, 안데스에, 아마존에, 대도시의 무허가 정착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새로운 그리고 옛 식민자들이 탐내는 땅에, 글로벌 도시들의 게토에, 그들이 댐을 건설하고 싶어 하는 강둑과, 그들이 광석과 광물을 캐내고 생명을 파괴하려는 언덕에, 미국과 브라질, 방글라데시의 노예노동을 이용하는 새로운 플랜테이션에, 우리가 땀과 슬픔으로 주인들의 소비 지상주의적 쾌락을 생산하는 세계의 마킬라도라들에 살고 있다. 우리는 관광객이 절대 가지 않는 곳에, 또는 가더라도 절대 살지는 않을 곳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 세계는 두 종류의 경계에 의해 나뉜다. 하나는 우리가 조건부로 받아들이는 경계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무조건 거부하는 경계들이다. 전자는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국가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아끼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경계들에 비해 덜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다. 후자는 벽, 참호, 수로, 철조망 울타리, 경찰차의 저지선, 검문소이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사람들의 마음과 법과 정치 속에 심연적 선들을 그어 옴으로써 우리를 선의 저쪽으로 추방해 버린 지도들이다. 최악의 경계는 선의 이쪽 편, 즉 수도가 엑스크레멘티아(Excrementia)인 카카니아(Kakania)에서는 보이지도,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는, 또는 느껴지지도 않는 경계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그은 선의 저쪽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전의 혁명들의 성공이 우리를 포함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읽히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여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 혁명들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과거만 있을 뿐 미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도 역사책을 쓰도록 허락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항상 질병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죽을 위험 속에서, 친목 경기가 아닌 상황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위험 속에서, 집, 땅, 물, 성스러운 영토, 아이들과 조부모를 잃기 일보 직전의 상황 속에서, 항상 전쟁을 피해 먼 곳으로 이주당하거나 우리의 동네(바리오, barrio) 또는 수용소에 갇힐 위험 속에서 산다. 우리의 민중적, 연대적, 협동적 저축이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그들이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의 이름으로 우리의 강이 오염되고 우리의 숲이 벌목당하는 것을 볼 위험 속에서, 우리가 열등한 젠더, 인종, 계급 또는 카스트에 속한다는 이유로 대응할 힘도 없이 모욕을 당할 위험 속에서, 우리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유한 아이들의 장난의 표적이 될 위험 속에서, 빈곤해질 위험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로서 도움을 받게 될 위험 속에서, 또한 어머니 대지를 지키길 원한다는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간주될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실로, 너무 많은 위험을 마주하고 있어 결국에는 순응하고 말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어떤 종류의 열정이 우리를 추동하는가? 가장 강렬하고 다양하게 경험된 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가장 주관적이고 다양한 열정이다. 그 진실은 바로 우리는 존엄한 삶을, 폭력과 수탈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삶을,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살 자격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가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열정적 진실과 진실된 열정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현실이 현존하는 것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현존하지 않는 것의 대부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었고 또 마땅히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알고 있다. 시간은 우리의 열정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우리의 형제 에보 모랄레스는 교황 바오로 3세가 1537년 교황 칙령에서 인디오들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선언한 이후 대통령이 되기까지 무려 5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 도달하게 된 것은 바로 그 교활한 칙령으로부터였다.
우리는 누구에 대항하여 싸우는가? 선의 이쪽에서는 모든 것이 매혹적이고, 선의 저쪽에서는 모든 것이 무섭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선에는 양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며,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은 삶을 상상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맥락은 다른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존엄한 삶이 지닌 긴급성이다. 우리는 오직 문명적 변화만이 이를 보장할 수 있음을 알지만, 우리의 긴급성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 오늘을 살아 내야만 하고, 역으로,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야만 한다. 우리의 지속(durée)과 시간들은 오로지 우리의 투쟁에 쓸모 있는 것만을 강조한다. 우리의 시간은 평면적이거나 동심원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더 이상 아님(No Longer)’과 ‘아직 아님(Not Yet)’ 사이의 통로들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선의 우리 쪽의 시대가 선의 그들 쪽의 시대와 일치하지만, 이 두 시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시대적이다. 우리의 시대는 이전의 모든 시대보다 잠재적으로 더 혁명적이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이토록 많은 부당한 고통이 가해진 적이 없었고, 권력과 억압의 원천이 이토록 다양하고 강력했던 적도 없었다. 이 행성의 인간 존재들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비록 모호하고 뒤틀려 있을지언정, 어떤 생각이라도 가지는 것이 오늘날처럼 가능했던 적도 없었다.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글로벌 노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이며 고통의 초국가화(transnationalization)에 점점 더 특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다. 공장이 이전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메가프로젝트와 기업농, 광산업으로 인해 수탈당한 인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들, 인종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메리카와 호주의 원주민들,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árez)에서 살해당한 여성들, 우간다와 말라위의 게이와 레즈비언들, 너무나 가난하지만 또한 너무나 부유한 다르푸르의 사람들, 살해당하고 콜롬비아 태평양 연안의 끝으로 쫓겨난 아프리카계 후손들, 생명의 순환에 타격을 입은 어머니 대지, 테러리스트로 몰려 세계 곳곳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 강제 송환의 위기에 처한 서류 미비 이민자들,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삶의 순간들을 기념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이라크인들, 아프간인들, 파키스탄인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대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경멸과 독단으로 자신들을 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빈곤한 북미인들, 금융 해적들이 휘두르는 약탈 법칙의 먹잇감이 된 은퇴자들, 실업자들, 그리고 고용 불가능한 사람들.
다른 한편, 우리의 시대는 모욕당하고 천대받은 자들의 귀환의 시대다. 이것이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희생자가 아니다. 우리는 희생당하는 자들이지만 저항으로 맞선다. 우리는 다수이며 우리의 새로운 배움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의견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 안에 배신자들이 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폭로하는 데 전문가다.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적들과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운명은 어딘가 통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그리고 최근에 더욱 증가시킨 고통은 종국에는 그들 자신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그들 중 가장 분별 있는 자들은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현자 볼테르가 말하곤 했듯이, 모든 전쟁의 원인은 도둑질이다. 집 밖에서 훔치는 법을 배운 자들이 이제 집 안의 사람들로부터 훔치고 있다. 만일 고통, 살인, 모욕, 파괴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지구의 생존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우리의 적들은 이미 폐쇄형 주거 단지가 필요 없는 다른 행성을 식민지화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투쟁 중 첫 번째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현자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일을 다 하고 난 뒤에는 세계가 변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 변화 없이는 어떤 변화도 없다. 존엄한 삶 또는 잘 사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존엄성에 순응하고, 우리에게 강요된 것과 우리가 염원하는 것 간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부인하는 한 말이다.
우리는 어떤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가? 모든 인간과 비인간 동물처럼, 우리는 가능성들, ‘더 이상 아님’과 ‘아직 아님’ 사이의 통로들에 특화되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확실성은 가능성과 내기(wager)에 관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확실성은 우리를 마비시킬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부분적 지식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조건들 자체도 부분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현자 파농을 따른다. 그에 의하면, 각 세대는 상대적인 불투명함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찾아내고 그런 다음 그 사명을 완수하거나 배반해야 한다. 우리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직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만 확정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달리면서 성찰한다. 우리의 길은 반쯤 보이지 않고 반쯤 눈이 멀어 있다. 우리가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족쇄들과 관련한 바로 그 확실성조차도 기만적이다. 시간이 가면서 족쇄들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장식으로 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포함하여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족쇄를 채우게 할지도 모른다.
어떤 종류의 지식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우리의 지식은 직관적이다. 그것은 곧장 긴급하고 필수적인 것을 향해 간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 담긴 침묵(words and silences-with-actions), 감정이 담긴 이성(reasons-with-emotions)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삶과 사유를 구별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일상성(everydayness)은 매일 세세하게 사유된다.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마치 오늘인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들이 없다. 오직 생산적인 질문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지식은 몸에 붙어 있기에 저공비행을 한다. 우리는 느끼며-생각하고(feelthink) 느끼며-행동(feelact)한다. 열정 없이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위한 관을 짜는 것이고, 열정 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 관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심 있어 하는 다양한 지식을 얻는 데 갈급하다. 자신을 열렬히 알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찾고 있는 많은 지식들이 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한 우리의 투쟁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지식도 낭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들을 섞고 그것들에 국한되지 않는 논리들에 따라 그 지식들을 결합한다. 우리는 저자의 저작권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의 저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 방식의 지식은 실존적이고 경험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회복력이 있고 유연하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카카니아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여기 우리 사이에서는 생각이 곧 사람이다. 그것은 무게를 지니며, 초과 중량의 경우에는 벌금을 낸다. 그것은 옷을 입으며 점잖지 못한 노출로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일로 항소를 제기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교육받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격증을 가장 적게 가진 교육자들이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낭비된 지식이며, 우리 자신에게는 객관적이고 우리의 적들에게는 주관적인 지식이다. 그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자 우리의 것이고, 그들이 우리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그저 그들의 것일 뿐이다. 대학들은 학과, 책, 경력, 컴퓨터, 종이 뭉치들, 유니폼, 특권, 박식한 담론, 총장, 관리자 등 모든 목록을 완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교육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의 임무는 우리를 무지한 자로 만들어, 양심의 가책 없이 우리를 무지한 자로 대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악 중에서 선택하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 자신을 교육한다. 언젠가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게 될 때, 다시 말해 우리가 대학을 점거하고 탈식민화하게 될 때, 우리는 단순히 강의실 문을 열고 벽을 새롭게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과 벽 모두를 파괴할 것이다.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생명의 모든 무기들이며, 죽음의 무기는 하나도 없다. 사실, 오직 우리 언어로 된 고유한 이름을 가진 무기들만이 우리에게 속한다. 그 외의 다른 무기는 모두 우리의 적들로부터 전리품, 또는 의도치 않은 유산으로서 가져온 것들이다. 민주주의, 인권, 과학, 철학, 신학, 법, 대학, 국가, 시민사회, 입헌주의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무기들을 자율적으로 사용할 때 그것들이 적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하지만 빌린 무기들은 오직 우리 자신의 무기들과 함께 사용될 때만 효과가 있다. 우리는 유능한 반란자들이다. 우리는 현자 마르코스 반란군 부사령관을 따른다. 그에 따르면, 최고위급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기쁨과 환희는 피해자들이 더 이상 피해자이기를 멈출 때, 그들의 고통이 저항과 투쟁으로 바뀔 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 육화된 예술가들이며, 우리의 예술은 솟구쳐 오른다. 유일하게 추하고 슬픈 진실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들이다. 우리가 저항하며 드러내는 진실들은 아름답고 기쁘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동맹자들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가? 우리가 광범한 다수라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는 매우 적다. 다른 이들이 우리와 함께하려 하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뭉쳐야 한다. 우리는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직 그 도움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도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때, 우리는 도움 그 자체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도움을 요청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명되었고, 우리는 도리어 항상 민주주의를 두려워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두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환상도 없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게 될 때 우리의 적들은 그들의 오래된 발명품들, 즉 독재, 폭력, 갈취, 그리고 합법성과 불법성의 자의적 조작으로 돌아갈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적들에 의해 기만으로 변질된 현실에서 스스로를 해방할 때까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 싸울 것이다. 우리는 인권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도록 인권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적들은 우리를 인권 담론의 전 지구적 객체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모두가 인권의 주체가 될 때, 누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기억하겠는가? 인간이 비인간을 담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신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해방신학의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의 동맹자들은 우리와 연대하고 있으면서도 선의 우리 쪽에 있지 않기에 목소리를 가진 모든 이들이다. 우리는 ‘연대’가 함정이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만 연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는 연대에 조건을 붙인다. 우리와의 동맹은 까다롭다. 우리의 동맹자들은 세 종류의 적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적들, 그들의 적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적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상식적인 견해이다. 구체적인 적들은 다음과 같다. 같은 무관심-생산 공장에서 인증받은 편안함과 불편함, 나태함과 그보다 손위 자매 격인 행동을 명령하는 자의 나태함, 일시적인 무감각과 그에 못지않은 일시적 열정, 단지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역설, 행동과 무행동 모두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의 부족과 논거의 과잉, 육체 또는 열정 없는 추상적 사고, 실제로 살기보다는 읽기 위한 원칙들의 목록, 통계적 동질성을 겨냥하여 설계된 이해와 재현, 아이러니와 풍자 또는 희극이 없는 비판, 전체로 여겨지면서도 오직 개인으로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믿음, 다른 모든 이들을 경멸하면서 우리를 경멸하는 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 정물에 대한 선호와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공포, 고객이 되고자 하는 또는 고객을 가지고자 하는 이중의 강박, 부를 잃을까 또는 가난을 잃을까 하는 이중의 두려움, 최악은 이미 지나간 것인지 아니면 이제 곧 닥칠 것인지에 대한 이중의 불확실성, 강박에 대한 강박, 불확실성에 대한 불확실성,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적들, 우리가 함께 맞서 반란을 일으켜야 할 자들은 오직 그 다음에야 온다.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동맹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그들 자신이다. 즉, 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 그들이 우리의 정직한 동맹자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 지금의 자신이기를 멈춰야 하는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동지 아밀카르 카브랄(Amílcar Cabral)이 한때 말했듯이, 그들은 계급으로서 자살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울 리 없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동맹을 구축하는가? 세계는 인간과 자연에게 지나치게 크다. 억압적인 세계는 피억압자에게 지나치게 크다. 억압받는 자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소수일 것이며, 그들이 단결하지 않는다면 더욱 소수가 될 것이다. 단결은 힘을 만들어내지만, 가장 훌륭한 힘은 단결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우리에게는 지도자도 없고 추종자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동원하며, 성찰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다중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조직과 운동들의 다중이 되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현자 스피노자를 따른다. 그러나 오직 그가 현자 간디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과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 자발성(spontaneity)은 그 자신이 새로운 현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한에서만 현 상태를 해체한다.
우리는 목적과 행동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문제들은 실천적이고 우리의 질문들은 생산적이다. 우리는 두 개의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은 ‘고통’이라는 단어로 환원되지 않으며, 우리는 부당한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우리가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모호함은 우리를 마비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꼭 일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수렴해야 한다. 우리가 꼭 통일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일반화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상호적으로 번역하며,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번역에 관여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한다.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행동들에 대해 합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합의에는 많은 감정들과 감각들이 기여한다. 그것들은 아무 말 없이 주장하고 비판한다. 번역은 우리가 집단행동의 한계와 가능성을 정의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미소와 정서들을 통해, 손과 팔의 온기를 통해, 그리고 춤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소통하며, 그러다 마침내 공동 행동의 문턱에 도달한다. 결정은 언제나 자율적이다. 각기 다른 이유들이 수렴된 결정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감수하는 위험들을 제외하고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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