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유럽중심 비판이론의 한계와 글로벌 사우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는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남의 인식론』 중에서 <1장> 부분을 요약하며 읽은 내용입니다. 누에스트라 아메리카라는 낯선 말이 등장하는데요. 그렇게 어려운 용어는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두 개의 20세기 중 하나는 유럽적 아메리카, 또 하나는 누에스트라 아메리카라고 합니다.
이 글에서 저자는 또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을 들어, 아리엘적 존재냐 칼리반적 존재냐를 말하고, 새로운 세계시민주의를 향하기 위해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묻습니다.
요약문으로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교수의 깊은 사유를 다 알 수는 없겠지요? 책이 궁금하시면, 서점으로 고고!!
누에스트라 아메리카: 칼리반과 아리엘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세계시민주의를 향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를 바라보며, 라틴아메리카는 단순한 지역을 넘어선 하나의 은유가 됩니다. 보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이를 ‘누에스트라 아메리카’라 부르며, 이 공간을 통해 새로운 해방 정치와 세계시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 장대한 담론 속에서 두 개의 20세기를 구분합니다. 하나는 유럽 중심의 '유럽적 아메리카 세기', 다른 하나는 식민주의의 유산과 혼종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 세기'입니다.
유럽적 아메리카의 그림자, 사회적 파시즘
산투스는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를 사회적 파시즘의 시대로 규정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와 복지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수많은 이들을 사회계약 밖으로 배제하고, 불안정과 폭력 속에 방치하는 체제입니다. 이 체제 하에서는 일상적 기대마저 무너지고, 노동자, 소수자, 토착민은 끊임없이 생존의 위협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기존 유럽의 식민적 사고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가장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새로운 가능성, 누에스트라 아메리카의 반란적 에토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입니다. 호세 마르티의 사상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유럽적 보편주의에 대항하여 혼종성(메스티사헤)과 상황적 지식, 그리고 탈식민적 상상력에 기반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누에스트라 아메리카는 단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세계시민주의와 정치, 문화, 법의 새 질서를 상징합니다. 이 공간에서는 식민적 질서에 저항하는 '칼리반'과, 자기 성찰과 연대를 통해 지식으로 해방을 모색하는 '아리엘'이 핵심적인 은유로 작동합니다.
바로크 에토스와 메스티사헤: 전복적 혼종의 힘
산투스는 이러한 주체성을 ‘바로크 에토스’라 부르며, 혼종화의 극단성과 전복적 상상력이 결합된 사회적 실천의 형태로 설명합니다. 이는 기존 제도나 규범에 안주하지 않고, 유희, 축제, 감정과 열정을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바로크 에토스는 유럽의 권력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형성된 해방적 창의성의 표현이며,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하고 재구성하는 메스티사헤적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실패와 교훈: 누에스트라 아메리카의 한계
물론 누에스트라 아메리카는 완벽한 해방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주의, 내적 엘리트, 사회 내 차별의 벽에 가로막히며 수많은 민중운동이 좌절을 겪었습니다. 특히 메스티사헤 개념은 종종 백인 엘리트에 의해 왜곡되어, 식민적 폭력을 감추는 수단으로도 작동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탈식민적 메스티사헤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미래를 향한 제안: 아리엘의 변모
산투스는 이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가 세계화된 은유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남반구, 북반구를 막론하고, 세계 곳곳의 억압받는 이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아리엘을 소환합니다.
아리엘은 단지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칼리반과 연대하며, 투쟁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탈식민적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아리엘은 단순히 봉사하는 노예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시민주의를 잉태하는 존재입니다.
마무리하며
『누에스트라 아메리카』는 단순한 지역연구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칼리반인가, 아리엘인가?”이 질문은 단지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니라, 모든 주변부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보편적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