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낯선 것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내동댕이치며,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나에 의해 열려진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약해빠진 햇빛이 누가 보고 있건 보지 않건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먼지들 사이를 유영했다. 바닥이 꺼진, 아니, 더 정확하게는 마루가 꺼진 은신처, 거기에는 아무런 특별한 것도 없이, 어둡고 담담하고 메마르기만 했다. 나는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은신처라는 뜻에 맞게 그곳에 내 몸을 숨겼어야 했는데,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고 믿어지는 무언가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려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마루가 꺼져 있었으므로. 너무 늦었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오히려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기, 마루가 꺼진 은신처 앞에 서 있는 내 뒤통수를 향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서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 안에서는 먼지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알전구마냥 번쩍댔고, 나는 비스듬히 열린 문 앞에서 낙담하는 대신, 느긋한 마음으로 달리기 코스의 디테일을 추억하며, 한 번도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꼭 오고야 말 것으로 여겨지는, 한편으로는 문을 열기 직전까지는, 그리고 은신처의 마루가 꺼졌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피하려고만 했던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향해 전언을 날리기를 기다렸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이치은, 알렙)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