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말 한마디,


시장통의 사투리,


건설 현장의 전문 용어,


거리의 시위 문구까지—



언어는 언제나 살아 있다.



한국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세계 속의 미래


말과 글을 사랑하는 모두에게 권하는 필독서


📖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낸 인문 교양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표지판 하나, 간판 하나에도

삶의 언어가 흐른다!”

국어학자 한성우 교수의 30년 언어 기행,

제주에서 백령도까지, 옌볜에서 뉴욕까지

말과 글의 ‘진짜 현장’을 누비며 그려낸

한국인의 언어 경관 풍경화.

-----------------------------------------------------------------------

노가다판을 아시나요? 봉제 골목과 인쇄 골목에서 일하는 이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하시나요? 수술실의 의사만큼이나 이들도 중요한 일을 하는 전문가임을 인정한다면 이들이 쓰는 말을 이들의 손에 맡기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들은 ‘일제의 잔재’라고 일컬어지는 정체불명의 외래어에 대한 ‘공구리 지지층’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일본어를 쓰던 세대, 일본어를 알던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데파’와 ‘아루’의 역사가 100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테이퍼’와 ‘래디우스’의 시대가 열립니다. 혹은 ‘빗각’과 ‘반지름’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결정은 그들이 합니다.

- 《말과 글의 풍경》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간 소개

말과 글의 풍경

거리의 언어들, 생활어의 풍경들.

국어학자와 함께 살펴보는 언어 경관


한성우 지음|304쪽|140*225|무선|2025년 10월 9일

18,000원|ISBN 979-11-994033-3-8 03710

국내도서 > 인문학 > 기호학/언어학 > 언어학/언어사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문화사

방언 연구자 / 사투리 전문가 한성우 교수가 안내하는 ‘말과 글의 현장’

한국인의 언어 경관에 관한 종합 안내서

방언학자 한성우는 『말과 글의 풍경』에서 ‘언어 경관(Linguistic Landscape)’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말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풍경임을 말한다. 언어학의 연구 분야 중 최근 ‘언어 경관’이 주목받고 있다. 어떤 공간이든 그 지역과 장소의 특성을 드러내는 말과 글이 있는데 그것이 보여주는 경관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거리의 표지판, 상점의 간판, 낯선 이를 위한 안내문, 그리고 귀를 통해 들어오는 낯선 말들이 연구 대상이다. 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은 한국인의 언어 경관을 다각도로 그려내려 한 첫 시도이자, 이러한 대상을 연구논문이나 책이 아닌 말랑말랑한 글로 함께 나누고자 쓴 교양서이다.

언어는 고정된 규범이나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을 비판하며, 변화하고 융합하는 언어의 본질을 긍정하고 소통의 도구로서 그 가치를 존중하자고 한다. 사투리, 신조어, 전문 용어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말과 글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며, 그 속에 담긴 삶의 흔적과 시대의 변화를 깊이 있게 탐색한다.

말과 글을 찾아 떠나는 여행

한국어 중에서도 방언(사투리)을 주로 연구하는 한성우 교수는 30년 넘게 국내외 여러 곳에 방언 조사를 다녀왔다. 그리고 20년 전에 문득, 서울의 세종대로에서 목포역까지 1,660리에 이르는 국도 1호선의 풍경을 글로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 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1년 동안 실제로 그 풍경을 탐사하면서 글을 썼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녘의 제주에서 북녘의 두만강 너머 옌볜까지 각 지역의 풍경을 담아보았고,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인천의 소래포구 어시장부터 새로운 시대를 향한 외침이 넘쳐나는 시위 현장까지 다양한 장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공사 현장의 ‘노가다’의 말부터 접두사 ‘K’가 붙는 한국어 연구자의 말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고, 문해력이 부족하다 놀림을 받는 젊은 세대의 말부터 수천 년의 우리 역사를 다룬 사극의 말까지 시대를 오가며 말과 글을 들여다보았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지금 여기 한국어의 언어 경관을 그려내면서, 몇 가지 통찰을 전해 준다.

먼저, 언어는 살아 있는 풍경이란 점이다. 말과 글은 단순히 문법과 어휘의 집합이 아니라, 거리의 간판, 시장의 소음, 병원의 대화 등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경관’이다. 이 경관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반영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다.

둘째, 모든 말은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표준어 중심의 위계적 언어관을 탈피하여 제주 방언, 건설 현장의 ‘노가다’ 용어, 청년 세대의 신조어 등 모든 형태의 말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강조한다. 언어의 오염이나 파괴가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와 융합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규범보다 소통이 먼저다.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통에 있다. ‘금일’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오늘’을 쓰는 것이 맞으며, 복잡한 띄어쓰기 규정에 얽매이기보다 의미 전달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 정책과 교육 역시 현실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언어는 사회문화적 맥락의 산물이다. 야구장의 응원 구호, 시위 현장의 피켓 문구, 노래 가사의 변천 등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통해 언어가 어떻게 시대를 반영하고 공동체의 정서를 담아내는지를 분석한다.

글로벌 시대의 한국어는 융합의 언어다. K-문화의 확산과 함께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어의 위상을 조명하며, 외국어와의 혼용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한다.

1997년 중국 옌볜의 새벽부터, 2024년 서울 여의도의 촛불 행진까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태어나는

말과 글의 풍경 다섯 마당.

언어 경관(말과 글의 풍경)을 그려내기 위해, 저자는 명확한 구도를 세운다. 그 구도의 두 축은 시간과 공간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말과 글이 달라지며, 같은 시대를 살더라도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말과 글이 쓰인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모임에서 각기 다른 말을 쓴다. 언어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러한 다양한 말을 차례로 시간방언, 지역방언, 사회방언이라 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말과 글을 그린 풍경화의 기본적인 구도가 된다고 설명한다.

1부에서는 이 땅의 모든 말과 글을 찾아 떠나본다. 남쪽 끝 제주도에서 북쪽 끝 백령도까지, 그 사이에도 수없이 많은 지역의 서로 다른 말들이 있다.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산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늘과 맞닿은 땅만 보이는 김제와 만경의 들에서 쓰이는 말과 글도 살펴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머릿속에서 잊힌 북녘땅의 말도 들여다보면서 통일 이후의 말과 글에 대한 생각도 펼쳐 본다.

1부의 첫 풍경은 제주의 말을 그려냈다. 살아 있는 언어로서의 제주어를 다루면서, 저자는 제주어가 ‘오염’되거나 ‘소멸’하고 있다는 우려에 반대한다. ‘ᄆᆞᆯ(馬)’이 ‘몰’로 변하는 것은 제주어만의 고유한 변화이며, 언어를 박물관에 가두려는 시도는 오히려 언어의 생명력을 해친다고 비판한다. 또, 제주도민은 제주어와 표준어를 모두 구사하는 이중언어 화자로서 소통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제주어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방문하는 ‘뭍엣것’에게 있다고 신랄히 지적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웰컴투 삼달리」 등이 완벽한 제주어를 구사하지는 않더라도, 제주어가 특별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소통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대중문화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2부에서는 삶의 향기가 스며 있는 곳을 찾아 발품을 팔아본다. 삶은 곧 ‘먹고 사는 것’이니 수많은 먹거리들이 오가는 어시장(소래포구)이 가장 먼저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도 오랜 시간 앉아 있어 본다. 과거에는 건달들의 놀이터로 인식되던 당구장,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는 야구장을 찾아, 오고 가는 말과 글도 담아본다. 가지 않는 것이 좋지만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가야 하는 병원, 그리고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 귀를 호강시키는 음악회장의 말과 글도 그려본다.

소래포구 어시장은 팔도 언어의 ‘모듬’이자, 말과 글의 황금어장이다. 어시장의 간판(‘○○수산’), 메뉴(‘모듬회’), 호객 행위는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언어의 현장이다. ‘스키다시’, ‘세꼬시’ 등 일본어에서 유래한 용어들을 살펴보면서, 이를 단순히 청산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전문가(‘칼잡이’)들의 언어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삶의 현장에서 쓰이는 ‘싯가’라는 말, 즉 어시장의 ‘싯가’는 단순히 가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 노동의 가치가 집약된 경제 활동의 축소판이다.

3부에서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의 말과 글을 담아본다. 나라가 달라지면 말도 달라지지만, 중국의 옌볜과 미국의 뉴욕에서 듣고 보게 되는 말과 글을 통해 우리의 말이 세계 속에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한자를 공유하고 있는 일본의 도쿄, 한자와 중국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중국 음식점의 메뉴판을 살펴보며 한중일 세 나라를 회유하는 말의 흐름도 정리해 본다. 그리고 최근에 부쩍 관심이 높아진 접두어 ‘K’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학 국제학술회의장에서의 자랑스러운 한국어도 들어본다.

저자는 중국 옌볜에 가서, 한자와 한글이 공존하는 독특한 언어 경관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최초의 표준 한국어는 함경도에 뿌리를 둔 옌볜의 말이었다고 해석한다. K-문화의 영향으로 ‘오빠’, ‘친구’, ‘꽃길’ 등이 중국어로 유입되는 현상도 있다.

뉴욕의 한인 타운에서 저자는 세계 도시 속 한국어의 위상을 간판을 통해 분석해 보았다. 더큰집(THE KUNJIP), 치맥(CHIMAEK), 그리운 miss KOREA…… 이렇게 ‘짬뽕’처럼 여러 언어가 섞이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한글의 우수성을 내세우기보다 세계인으로서 외국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4부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달라져 온 말들의 자취를 밟아본다. 오늘을 살며 과거를 돌아보는 사극에서의 말투를 통해 같으면서도 다른 말의 흐름을 살펴본다. 젊은이의 말은 늘 다르기 마련이고 그 다른 말들이 언어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는 젊은 세대의 마음이 되어 보았다. 자랑스러운 한글을 기리는 한글박물관은 말과 글의 변화를 어떻게 전시하는지, ‘오빠’라는 호칭은 어떠한 시대적 변화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을 사는 이들의 정치적인 구호는 어떠한지도 세세하게 그려본다.

사극의 말투는 만들어진 말투이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와 같은 사극 말투는 실제 그 시대의 말이 아니라, 과거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고정된 양식이다. 한편, 영화 「황산벌」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현대의 평안도, 전라도/충청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설정을 통해, 시간적 배경에 공간적 차이를 더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또 흥미로운 점은, 북한의 사극 역시 남한의 사극과 유사한 옛 말투를 사용하기 때문에, 현대물보다 남한 시청자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극에서 남과 북의 언어 장벽은 더 없어진 셈이다.

저자는 신세대의 어휘력 논쟁을 들여다본다. ‘사흘’, ‘금일’ 등을 둘러싼 논란은 본질적으로 ‘문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간에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달라 발생하는 소통의 문제라는 점이다. 자주 쓰지 않는 단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두고 특정 세대를 조롱하기보다, 듣는 사람을 기준으로 쉬운 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어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바늘을 방망이로 만들지 말고, 과잉 진단과 엉터리 처방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언어의 사막화를 막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통과 이해가 필요하다.

5부에서는 무심하게 겪고 보내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치열한 말과 글의 변화를 살펴본다. 우리의 노래는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삶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는 이들은 어떤 말로 소통하면서 시대의 한 단면을 어떻게 장식하는지 돌아본다. 띄어쓰기는 어떠한 역사적 흐름을 담고 있는지, 표준말의 바탕이 된 서울말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의 자부심이 응축된 한글을 우리는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의견을 보태본다.

현장 전문가의 말을 어떻게 존중해야 할까. ‘데파(taper)’, ‘아루(radius)’, ‘공구리(concrete)’ 등 건설 현장 용어는 무식한 말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전문가들의 언어’다. 이러한 ‘노가다 용어’는 충분히 재평가할 수 있다. 의사들의 전문 용어(주로 영어)는 용인하면서, 건설 노동자들의 용어를 비난하는 것은 ‘무식은 죄’라는 사회적 편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유식무죄, 무식유죄의 편견이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전문가 언어는 존중받아야 한다.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공구리’가 ‘콘크리트’로 바뀌듯, 현장의 용어는 세대 교체와 함께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이는 인위적인 순화가 아닌, 말의 주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그려낸 다섯 묶음의 풍경화가 우리의 말과 글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모든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과 장소에서 그들의 말을 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이 곧 말의 주인이고, 이들의 말이 곧 한국어이다. 따라서 이 책에 그려놓은 것은 말과 글에 대한 풍경 중 일부일 뿐이고 우리가 매일 겪는 삶 속에서의 말과 글이 진정한 풍경이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 모두가 풍경화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우리 모두가 매일 그려내는 말과 글의 풍경을 스스로 돌아보며 더 아름답게 그려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저자 소개

저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열한 살 되던 해부터 30여 년간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마치고, 인하대학교에 재직하게 된 이후 20년 가까이 인천에서 살고 있다. 충청 방언으로 석사 논문을, 평안 방언으로 박사 논문을 쓴 후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방언학회 전 수석부회장을 역임했으며,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현재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다.

방언과 말소리에 대한 연구서 외에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말씨 말투 말매무새』 『서울의 말들』 등 말을 주제로 한 인문 교양서를 써 왔다.

2019년부터 《문화일보》에 매주 ‘맛의 말, 말의 맛’을 연재하고 있다. 2024년에는 《경향신문》에 격주로 ‘말과 글의 풍경’을 연재했다.

차례

0 프롤로그

말과 글의 풍경을 찾아 떠나는 여행

1 이 땅의 모든 말과 글

01 제주의 말: 이 땅의 모든 말과 함께하는 제주말의 블루스

02 전북 ‘징게맹겡’ 들판의 말: 징허고 짠헌, 그래서 솔찬히 거시기한 말의 향기

03 서울역의 말: 사람도, 문화도, 말도 어서 타세요, ‘세계행’ 열차 출발합니다

04 백령도의 말: 통일을 기다리며, 최북단 섬에선 ‘한국어 융합 실험’ 진행 중

05 북녘의 말: 규범이 남북의 말을 갈라도, 통하다 보면 통일도 온다

2 삶의 향기가 스민 말과 글

01 소래포구 어시장에 가다: 시끌벅적 팔도 언어 ‘모듬’, ‘싯가’ 따라 크고 작은 행복 한 접시

02 옛날 다방에 가다: 가슴 설렌 ‘약속’ 지금 어디에, 옛날식 다방에선 ‘추억’을 판다

03 당구장에 가다: 공뿐 아니라 말들이 부딪치는 공간, 청산 대상 된 ‘쫑’ ‘삑사리’는 억울하다

04 부산 사직야구장에 가다: 사라진 “아 주라” 구호, 미래 세대의 말을 향한 기대와 애정이 되길

05 종합병원에 가다: 아픈 환자에게 필요한 건 약뿐 아니라 따뜻한 ‘소통의 말’

06 음악회장에 가다: 음표라는 작곡가의 말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연주는 ‘첨언’이다

3 세계를 품은 말과 글

01 중국 옌볜의 경관: ‘오우바’와 ‘친구’ 손잡고 경계를 넘어 ‘꽃길’로 가자

02 뉴욕에 가다: 간판 속 한국어 ‘짬뽕’이면 어때, K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잖아

03 도쿄에 가다: 도쿄, 혹은 동경에서 점쳐 보는 한자와 한자어의 미래

04 중국집의 짬뽕어: 깐풍기·마라탕·경장육슬, 알면 알수록 ‘짬뽕’인 중국집 메뉴판

05 한국학 국제학술회의에 가다: 산 넘고 물 건너는 한국어

4 시간의 흐름이 담긴 말과 글

01 사극의 말투: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에 식상? 그 말투로 과거와 현재, 남과 북이 통한다

02 신세대의 어휘력 논쟁: 중요한 것은 소통, ‘금일’을 모른다면 ‘오늘’을 쓰면 된다

03 한글박물관: 뻐카충·댕댕이·띵작, ‘자유분방 한글’ 또한 세종대왕의 정신

04 ‘오빠’의 성장기: 가정 울타리 넘어간 ‘호칭’은 무죄, 그 대상이 합당한 행동만 한다면

05 시위 현장의 말글 변화: 처절함 대신 친근함, 지금 시위 구호는 ‘질서 있는 교체 중’

5 말과 글의 최전선

01 노랫말: 노랫말·제목 영어 물결, 시대 흐름 맞춘 유행일까, 몰입 방해일까

02 현장 전문가의 말: ‘노가다 용어’라며 시비 걸기보다 ‘건설 전문가의 말’로 존중해야

03 띄어쓰기의 역사: 알면 알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띄어쓰기’, 규정보다 소통이 먼저다

04 서울말: 전국 각지 사람이 모여 사는 서울, 서울말은 융합과 포용의 말

6 에필로그

한글날: 외국어·신조어 판쳐도 한국어는 여전히 건강, 자학하지 말지어다

본문 중에서

제가 배우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언어학의 연구 분야 중 비교적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 경관(Linguistic Landscape)’입니다. 어떤 공간이든 그 지역과 장소의 특성을 드러내는 말과 글이 있는데 그것이 보여주는 경관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거리의 표지판, 상점의 간판, 낯선 이를 위한 안내문, 그리고 귀를 통해 들어오는 낯선 말들이 연구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대상을 연구논문이나 책이 아닌 말랑말랑한 글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7쪽

1997년 8월 새벽 4시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삼합진, 어렴풋이 날이 밝아오기는 하지만 너무도 이른 새벽인데 밖은 너무도 소란스럽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동포들의 조선말 반과,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만 들리는 한족의 중국말 반입니다. 창밖의 간판도 한글과 간단하게 줄여 쓴 한자가 반반이라 헷갈리는데 이 땅의 닭마저 조선족이 키우는 닭은 ‘꼬끼오’라고 우는 데 반해 한족이 키우는 닭은 ‘워워워(喔喔喔)’라고 울어 더 혼란스럽습니다. 이날 새벽의 풍경은 초점은 정확하지만 색채는 없는 흑백사진으로 또렷하게 남습니다. ― 0 프롤로그, 14쪽

제주도는 다릅니다. 우리 땅이지만 먼바다에 화산 폭발로 우뚝 솟은 섬이니 육지와 많은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뭍에 사는 이들은 그 다른 것을 즐기려고 가지만 말이 다른 것은 즐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주도는 섬이죠. 고립과 단절의 좁은 공간이니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넓은 뭍에서의 삶을 꿈꿉니다. 그렇게 오고 가는 사람들로 인해 제주도 말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제주어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이들은 제주어의 오염과 소멸을 염려합니다. 모두가 틀렸습니다. 제주도는 다르지만 같은 우리의 땅이고, 다르지만 같은 제주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 1 이 땅의 모든 말과 글, 22쪽

‘소정방(蘇定方)이 왔다(來)’ 해서 소래라고요? 단언컨대, 소정방은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이끄는 소정방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더라도 땅 이름은 그리 함부로 짓지 않습니다. 소래의 한자 또한 ‘蘇萊’이니 이런 지명 유래는 그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죠. 굳이 지명 유래를 찾고자 한다면 ‘소나무 숲 사이를 흐르는 내’를 뜻하는 ‘솔내’에서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 2 삶의 향기가 스민 말과 글, 75쪽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힘찬 함성 내뿜으며 내 마음을 울렸던 그 사직야구장은 참 조금도 안 변했군요.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떠올리며 부산에 갔습니다. 해운대와 광안리 바닷가, 국제시장과 범일동의 재봉틀 거리, 밀면과 돼지국밥, 그리고 30년 만에 다시 만나는 대학 친구 등 부산에 갈 이유는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직야구장이죠. 지금은 볼 수 없는 ‘봉다리 응원’과 때가 되면 울려 퍼지는 「부산 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고 시시때때로 울려 퍼지는 “마!”와 “아 주라!” 소리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입니다. ― 2 삶의 향기가 스민 말과 글, 105쪽

신라시대 말을 생생하게 듣고 싶나요? 꽤 오래전에 방영된 드라마이지만 「선덕여왕」을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시대는요? 고려시대는 얼마 전에 방영된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되고 조선시대는 지금도 채널을 돌릴 때마다 나오는, 갓 쓴 남자와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들이 수없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됩니다. 삼국시대의 말이 모두 궁금하다면 영화 「황산벌」을 보면 되고 고구려와 부여의 말이 필요하다면 드라마 「주몽」을 보면 됩니다. 아주 가까운 시기, 즉 1900년 전후의 말을 듣고 싶으면 「미스터 션샤인」을 추천합니다. ― 4 시간의 흐름이 담긴 말과 글, 191쪽

2024년 12월 3일의 계엄 사태에 같이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조용한’과 ‘질서 있는’을 외쳤지만 허무한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와 관련된 시위 현장에서의 말과 글은 묘하게도 ‘조용한 퇴진’과 ‘질서 있는 교체’를 보여줍니다. 이 시위에서 가장 눈길을 끈 부류는 ‘젊은 여성’입니다. ‘심심한’과 ‘사흘’을 모른다고 문해력 또는 어휘력을 의심받았던 세대이죠. 차별과 비하를 견뎌 오다가 극심한 남녀 갈등 상황에서 불거진 여대의 시위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들려주고 보여준 구호, 문구, 깃발, 노래는 말과 글의 조용하고도 질서 있는 변화를 나타내 줍니다. ― 4 시간의 흐름이 담긴 말과 글, 242쪽

노가다판을 아시나요? 봉제 골목과 인쇄 골목에서 일하는 이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하시나요? 수술실의 의사만큼이나 이들도 중요한 일을 하는 전문가임을 인정한다면 이들이 쓰는 말을 이들의 손에 맡기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들은 ‘일제의 잔재’라고 일컬어지는 정체불명의 외래어에 대한 ‘공구리 지지층’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일본어를 쓰던 세대, 일본어를 알던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데파’와 ‘아루’의 역사가 100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테이퍼’와 ‘래디우스’의 시대가 열립니다. 혹은 ‘빗각’과 ‘반지름’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결정은 그들이 합니다. ― 5 말과 글의 최전선, 269쪽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으나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한글 이전에도 한국어는 있었으니 한국어는 우리의 조상과 지금의 우리, 그리고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죠. 세대를 거듭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국어는 지금도 꿋꿋하게 쓰이고 있으니 태생적인 약골이거나 후천적인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한국어가 우리에게 깃들어 있고 그 한국어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고 있으니 중환자 취급을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문자의 생일에 굳이 언어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국뽕’에 빠지다가 언어에 대해서는 자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말인데 자책이 아닌 남 탓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말의 주인인데 주인이 스스로를 낮추고 남 탓만 한다면 한국어의 미래는 결코 밝지가 않습니다. ― 6 에필로그, 301-3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9월 19일, 49년 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죠. 이 금메달은 한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인데요. 또 하나,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획득한 금메달입니다. 바로 손기정 선수는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일궈 냈습니다. 물론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이었습니다.

최근 《손기정 평전: 제국의 트랙을 딛고 민족을 넘다》를 출판하면서, 손기정과 관련해서 출판된 책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손기정과 관련하여 출판된 주요 서적들은 그의 삶과 업적을 다룬 자서전과 평전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민족의 희망이었던 그의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전기, 소설, 어린이 도서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서전 또는 평전입니다. 현재 자서전은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손기정 저)이 출판되어 있는데요. 이 책은 1983년 71세의 나이에 출간된 손기정 선수의 자서전으로, 2022년에는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또 이 책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국적을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최초의 인물이다 보니, 일본인들의 관심도 높다고 할 수 있죠.

이 책은 주로,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우승, 일제 강점기 시절의 고뇌, 해방 이후의 삶과 지도자로서의 활동 등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직접 본인의 기억과 육성을 담은 자서전이 출판사를 바꿔 가면서 3번 재출간되었고요. 이후로는 평전이 이어집니다. 주로 객관적인 자료, 증언, 기록들을 토대로 쓰였죠.

《손기정 평전: 제국의 트랙을 딛고 민족을 넘다》(김성 지음, 서재길 옮김, 2025년 출간)는 단순한 영웅 서사를 넘어, 제국과 민족, 스포츠와 정치 사이에서 손기정 선수가 짊어졌던 시대적 무게를 조명합니다. 일본의 풍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제국의 스포츠 정책과 식민지 조선인 사이의 갈등을 다루죠.

《손기정 평전》(데라시마 젠이치 지음, 김연빈·김솔찬 옮김): 일본에서 출판된 평전을 번역한 것으로, 손기정 선수의 일생과 스포츠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은 전기와 소설입니다. 최근에 《1936 손기정, 세계를 제패하다》(주강현 지음)가 출판되었는데요. 전기에 해당하고, 저는 이 책을 미발굴 사료나 기록 중심으로 보려 했는데, 기존 사료를 다시 모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중심으로, 절망의 시대에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던 손기정 선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한국의 스포츠 영웅, 손기정》(하정희 저)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서적이며, 학술 서적입니다. 당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던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록과 그의 업적을 다룹니다.

어린이 도서도 있는데요. 《청동 투구를 쓴 소년》(소윤경 저)은 1920년대 신의주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소년 손기정의 어린 시절부터 청동 투구를 품에 안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입니다. 양장본이고 판형이 아주 큰데요. 웬일인지 가격이 좀 비싸요.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마라톤 영웅》은 현재는 품절되었고,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듯합니다. (eBook)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의 삶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렇게, 한국의 스포츠 영웅 손기정에 관한 책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손기정을 내선융화에 의해 자국 신민으로 보는 관점이 있어서, 손기정의 금메달은 제국 일본의 금메달이라 보죠.

재일 한국인인 김성 교수에 의해 쓴 《손기정 평전: 제국의 트랙을 딛고 민족을 넘다》는 단순한 영웅 서사를 넘어, 제국과 민족, 스포츠와 정치 사이에서 손기정 선수가 짊어졌던 시대적 무게를 조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민지 스포츠 정책과 식민지 조선인의 갈등을 다루죠. 일본 판의 부제인 <제국 일본의 조선인 금메달리스트>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이 갈등과 고뇌, 상처를 가진 영광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책을 북토크로 재구성한 유튜브 영상도 감상하시죠!

https://youtu.be/oD27_RD6pc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장기를 지운 영웅: 손기정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마라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청년에게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손기정! 그는 올림픽 신기록(2시간 29분 19초 2)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제국 일본의 염원’을 풀었지만, 동시에 ‘식민지 조선 청년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순간 뒤에는 개인의 고난과 민족의 비극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가난 속에서 피어난 마라토너의 꿈

손기정 선수의 삶은 가난과의 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식구가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제대로 된 스케이트화조차 살 수 없었던 소년에게 달리기는 “가난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스포츠”이자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압록강 변을 달리며 다진 실력은 마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약죽보통학교 담임 이일성 선생님을 만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그의 육상 인생은 전환점을 맞습니다. 특히 19세의 늦은 나이에 육상 명문 양정고보에 입학한 것은 그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시대의 모순: 스포츠와 ‘내선융화’

손기정이 성장하던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융화(內鮮融和)’ 정책을 추진하며 스포츠를 민족 통합과 제국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이미 김은배, 권태하 등 조선인 마라토너들이 활약하며 일제는 ‘외지까지 포획하는 제국 일본의 스포츠 상황’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 선수들의 복잡한 심경은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이 게양한 태극기와 가슴에 달아야 했던 일장기 사이의 괴리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승리는 ‘일본 대표 선수’로서의 영광으로 포장되었지만, 조선 민족에게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향한 질주

양정고보 시절, 손기정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기에 ‘헝그리 정신’을 길러냈습니다. 그는 경성이라는 중앙 도시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을 느끼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손기정은 1933년 비공인 세계 기록을 상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마라톤 영웅’으로 떠올랐고, 남승룡, 류장춘 등 조선의 라이벌들과 함께 기량을 갈고닦았습니다. 1935년, 그는 공식적으로 세계 최고 기록(2시간 26분 42초)을 수립하며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에 가장 가까운 선수로 주목받습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그의 활약이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며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시상대의 그림자: 고개 숙인 영웅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을, 남승룡 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하며 조선인 두 명이 육상 경기의 꽃인 마라톤에서 나란히 시상대에 서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조선 출신 청년이 실현한 꿈’이자 ‘조선 민족에게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기미가요’가 흘러나오고 일장기가 게양되자, 손기정 선수는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영웅이 된 승자는 그 시간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당시의 묘사처럼, 이 순간은 개인의 위대한 승리 뒤에 가려진 식민지 청년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금메달은 단순한 스포츠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을 딛고 세계 최고가 된 한 개인의 집념인 동시에, 민족의 억압 속에서도 ‘우수성’을 통해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조선 민족의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손기정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일장기’ 아래에서, 자신의 영광을 조국 광복의 염원으로 승화시켰던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손기정 평전: 제국의 트랙을 딛고 민족을 넘다』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삶을 단순한 영웅 서사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가 살아야 했던 시대적 모순과 정치적 압박, 그리고 해방 이후의 복잡한 행보를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분석하며, 스포츠와 정치의 얽힘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 책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풍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제국 일본의 스포츠 정책과 식민지 조선인의 갈등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단순한 전기적 서술이 아닌, 제국과 민족, 영광과 고통, 스포츠와 정치 사이의 틈에서 손기정이 짊어졌던 무게를 조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손기정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일본 쪽의 여러 자료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다소 모호하게 알려진 사실까지 검증하며 손기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교수신문(http://www.kyosu.ne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