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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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따지고보면 일종의 신파극이 될법했던 메인스토리가 괴상하게 변해버린 것은 오로지 미디어라는 매개체가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지극히 얌전하고 성실한 아가씨가 술집에서 처음만난 탈주범 청년과 사랑에 빠져서 그가 도피하는 것을 도와 곤경에 처한다는 스토리 자체는 그 누구라도 기시감을 느낄법한 뻔하디 뻔한 고전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황색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부풀려져 급기야 평범한 한 여인을 '실제'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바, 결국 본 소설은 아마도 '언론'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굳이 우리에게 읽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70년대에 쓰여진 본 소설은 독일에서 거의 조중동을 합한 수준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빌트지를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애초에 소설은 본 소설상의 신문인 '차이틍'과 '빌트'지의 관련성을 '굳이'부인함으로서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이미 정해놓은 수순대로 취재원의 언급을 왜곡하고 잡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키는 거대 언론의 횡포라던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심지어 너무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카타리나의 생활 자체가 언론 자체에 의해 이미 덧씌워놓은 이미지와 맞지 않자 그마저도 '악마의 주도면밀함'으로 해석해버리는 과정은, 그저 소설로 치부하고 읽기에는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다.(첨언하자면, 저자의 언급-일종의 '팜플렛'이라는-이 무색하게도 본서는 소설적으로도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본서는 단순히 개인과 언론간의 관계뿐 아니라 메카시즘적인 마녀사냥이 어떠한 구조로 돌아가는지, 그 과정속에서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인은 어떻게 유착되는지를 굉장히 미시적인 사건 속에서 그럴듯하게 표현하며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무엇에 의해 돌아가는가, 현대사회가 가하는 폭력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또 그만큼 얼마나 주도면밀한가, 아울러 우리는 그 속에서 과연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방어할 수 있는가.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같은 본 소설은, 저자 스스로도 표현했듯 팜플렛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상징적이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건 오늘 우리의 현실일게다. 상황이 더 비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늘날의 언론이 카트리나 블룸의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절보다 더욱 주도면밀해졌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언론은-카타리나 블룸에게 행했던 것처럼-노골적으로 기사를 부풀리고 취재원의 말을 조금 비틀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촌스러운'방법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언론은 오로지 진실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진실에 의해 거짓을 말한다. 그게 뭔소리냐고? 다들 미네르바 사건을 통해 그러한 부분을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목도했을꺼다. 전문대에 백수, 골방에 앉아 혼자 책만파던 네티즌이라는 '사실전달'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전달 자체가 왜곡이었다.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의 파괴적인 힘은, 말과 글이라는 도구로 이루어진 근대적으로 가장 고도화된 수단 즉, 법률과 규정에 의해 통제되는 것조차 어불성설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68혁명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지독했던 경험 속에 쓰여진터라, 본서에서는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 또한 오늘의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에 대해서, 소수자에 대해서는 사악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성을 보여주면서도 권력과 자본에는 알아서 굴종하는 언론과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시각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언론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하지만, 미디어는 현대사회에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미디어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딱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속에 국회는 지난주 미디어법을 지들말로는 '강행처리'했단다. 이런. 눈앞에 빤히 보이는 김이박씨의 잃어버릴 명예를, 그리고 부당하게 살아날 또다른 김이박씨의 때이른 복권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리고 그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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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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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본서는 국방부 불온도서로 지정된 책이고, 불온도서라는 고색창연하면서도 다소 무시무시한 그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내용은 매우 발랄하면서도 온건한 책이다. 장하준 교수의 기존 주장이 가진 함정이랄법한 '박통 향수'부분에 취약한 점도 없잖을 정도로 읽히기에 따라서는 복고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 말인 즉슨 역설적으로 그만큼 정파적 색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물론 이 부분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의미다. 

개인적으로는 공교롭게도 이 책을 군대에서 읽었다. (원채 초법적이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기초적인 교양마저 있긴 하신지 의심스러운 국방부 장관님께서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헌법에마저 규정된 형벌 불소급 원칙상 이 책을 내가 군대에서 읽었다고 무어라 하는것은 기존의 헌정질서를 문란케하는 행위일법하니 문제될일은 없을 듯 해서 밝히는 소리다.) 아무튼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군대내에서 내 생각이 특별히 바뀌었다거나 사고를 쳤다거나 한 건 아닐 뿐더러 집권 여당부터가 본서의 저자를 데려다 놓고 강연까지 들었다하니 굳이 어떤 이유에서 본서가 불온도서인지는 과문한 필자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그 코메디같은 불온도서 지정에 대한 결과는 전혀 코메디가 아닌데 이를테면 본인의 안면없는 선배이자, 내 동기와 안면있는 교회선배는 지극히 '위헌적인' 금서지정에 대한 헌소를 자신의 권리에 따라 제기했다가 밥줄이 끊길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니 말이다.  

사실 그간 장하준 교수의 저작을 읽은 독자라면 본서에서 그리 특별히 센세이셔널하게 화제가 될만한 내용을 찾지는 못할 것 같다. '사다리 걷어차기'가 다소 아카데믹했고, '쾌도난마 한국경제'가 너무 가볍게 읽혔다면 이 책은 그 중간선 정도를 지키고 있다는게 특이하다면 특이할까. 그 외에는 저자의 기존 주장에 비추어 굳이 특별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적재산권 부분이 조금 흥미롭게 읽히기는 했는데, 시장 혹은 시장주의에 관심이 있어 어느정도의 교양을 갖춘 독자라면 이 부분 또한 아주 신선할만한 이야기는 또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저자는 이런저런 위트(이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저자의 '인상'에 비하자면 조금 이례적이긴 했다. 장하준 교수님 인상이 왜 좀 많이 심심해 보이시잖나?)섞인 문체로 쉽고 지루하지 않게 설명했다는게 그간의 책에 비하자면 과격한 시장 '지상주의자'로서는 더 위험해 보일수도 있겠다만 글쎄, 그건 시장 '지상주의자'의 취향의 문제지 이 땅에 사는 건전한 젊은이들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시장이라는 순수한 기재가 사회에서 자연스레 설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상법이나 경제관련법 등 시장과 관련한 수많은 규정만 보아도 그 속에서는 시장에 대한 다채로운 입장이 뒤섞여 있다. 어떤 것이 공정한 경쟁이며 어떤것이 진정 자유로운 경쟁이며 그 자유로운 경쟁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관한 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실로 여러가지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그 시장을 '만들어'내고 '수정해'나간다. 이러한 상행위를 규정하고 조성하고 규제해 나가는 것이 대표적인 법이 상법이고, 그 명칭과는 달리 상행위에 대한 수많은 규제를 담고 있는 것은 '근로기준법'이 아닌 바로 그 '상법'과 공정거래법을 위시한 '경제법'이다. 이쯤되면 몇몇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법도 하다. 아니, 이런 반시장적인 법전이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했다는 대한민국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그런데 그거 아는가? 지구상에 상법전이 없는 나라는 체제내에 공식적인 '시장'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중국, 북한등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시장이란 민주사회의 사회적 합의 속에나 존재하며 순수한 시장이란 것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아니, 솔직히 존재하지조차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시장주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과연 '자유방임주의'적인가? 과문한 나조차도 그건 아니라는 증거를 수십, 수백가지 될수있다.) 따라서 '좋은'시장을 만들고자 하는 논쟁은 항상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진행중이다. 해서 공정한 시장을 만들고자하는 진지한 노력조차 이념적 딱지, 나아가 '반국가적'이라는 딱지를 붙혀가며 공격해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어쩌면 진정 '민주사회의 적'이자 '시장주의의 적'은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아무튼 불온도서니 뭐니해도 발전이나 개발, 아니 그보다 먼저 시장을 고민하는 분들께 본서는 괜찮은 '입문서'역할을 할것이라 보장한다. 그만큼 재미있게 서술되어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아마도 본서가 '화제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그 재미 때문이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재미가 없다면 그 몰교양적인 국방부 관계자가 읽을수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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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革 2009-07-23 18:1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오랜 만에 댓글로 인사 드리는 듯합니다. 종종 올려주시는 서평 재밌게 읽고 있었습니다만.. ^^;

국방부 불온도서 목록은, 한총련 추천도서 목록을 카피&페이스트한 걸로 들었습니다. --; 재미있는 책이어도 국방부에 계신 분들이 직접 읽고 손수 고르신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권정생 선생 책 등이 들어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 하더군요.

率路 2009-07-24 18:26   좋아요 0 | URL
앗, 오랜만이네요. 잘지내시지요?ㅋ^^;;;; 한총련 추천도서 목록 카피한거라니 의문이 해결되면서도 좀 많이 한심해 뵈긴 하네요..ㅋㅋㅋ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 - 경제 위기의 시대에 경제학이 갖는 의미와 무의미
폴 크루그먼 지음, 김이수.오승훈 옮김 / 부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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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강단 경제학'이 이야기하는 실물경제 문제의 처방책이나 방향제시라는 것의 대부분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뭔가 좀 뜨뜻미지근한 구석이 있다. 외팔이 경제학자를 원했다는 어느 대통령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집단간의 갈등과 타협 거기에 드라마틱한 요소도 조금씩 요구되는 현실정치에, 이도저도 아닌 것이 딱부러지는 이야기라고는 눈꼽만큼도 해주지 않는 경제학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썩 구미가 당기는 주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간에 시장통의 아주머니부터 주상복합 펜트하우스의 회장님까지 경제의 중요성을 외치는 세상이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경제'학'적 처방책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 민주주의 사회에서 경제'학'적 탐구가 정책화되는 과정에는 어느정도의 속류화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소외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경제'학'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경제사/경제사상사를 다룬 본서는 다른 경제서적과는 달리 경제학적 탐구의 결과물이 각 정파들의 정치적 프로젝트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어떻게 속류화되는지를 중점적으로 탐구하고 비판하고 있다.(해서, 분량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메시지만 파악한다면, 외려 '정치서'로 읽힐 지경이다) 즉 학자가 이야기하는 경제학/경제정책과 정책기획가가 이야기하는 경제학/경제정책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렇다. 경제학자들이 웬종일 매학기마다 방에 틀어박혀 연구를 한다고는 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아는 그들의 학적 결과물이라곤 기껏해야 엊그제 경제과목 막 배우고 나온 고등학생마저 조금만 노력하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 정도이다. 부두교 경제학의 창시자 쯤으로 이해되는 프리드먼도 그렇고, 무역이 무슨 경제전쟁인양 묘사하던 리버럴 계열의 경제학자들도 그렇고 이러한 논리들에 기반하여 추진되는 정책들의 취지를 듣다보면 조금 허무해진다(아니, 그 이상한 수학식에 그래프 그려대면서 내린 결론이 고작 이거란 말이야?) 어디 그것뿐인가, 그들이 '이야기했다고 여겨지는'현실 경제문제에 대한 처방책이란 것도 결국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음을 국민들이 체감하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알고있는 기존의 상식-그것이 통화주의자에 대한 상식이건, 케인지언에 대한 상식이건-이 정책기획가들의 속류화를 거쳐 왜곡된 내용의 것임을, 그리고 그러한 속류화 속에서 우리가 수용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왜곡과 아전인수격 논리로 가득차게 되었음을 신랄한 문체로 비판한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정책기획가들의 존재의의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 참여한 정당이, 아울러 이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가 국민에게 경제정책내용을 이야기하고 설득함에 있어 어느정도의 속류화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다. 사실 한 정부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만큼 장기적인 거시경제의 파동 속에서 정부정책이 경제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란 극히 미미한 것도 사실이고, 때로는 한 국가차원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이라는게 매우 제한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모두 기도나 드립시다.'라는 답을 원하는 유권자는 아무도 없다.(그리고 정부나 정치인은 그런 소릴 하라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정부나 정책기획가 스스로가 자신마저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저자는 진지한 보수주의자들의 경제학이 어떻게 공급중시 경제학으로 속류화 되었는지, 아울러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이의 발전적 변형-저자가 말한 바 QWERTY경제학-은 어떻게 전략적 무역론으로 속류화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이들의 주장을 효과적이고 신랄하면서도 매우 위트있게(?) 비판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감세가 경기를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후자에 대해서는 무역을 마치 전쟁처럼 바라보는 시각이란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논리인지에 중점을 맞춘듯한 저자의 비판은, 실상 오늘의 우리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두가지 유령-감세의 신화와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과 조응하는 면도 있어서 오늘의 우리 현실에 적잖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비교적 다소 전문적인 논의와 설명 속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바는 간명하다. 정부가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다. 하지만 국민 뿐 아니라 자신마저 속이는 정책적 속류화 과정은 경제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정책에까지 악영향을 미쳐('감세'라는 경제 정책의,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경제정책의 모토가 사회정책에까지 이어져 어떠한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는 요 며칠자 신문들 만으로도 충분할 듯 싶어서 생략한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경제학은 그것이 학교 켐퍼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치와 만나 정책화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논리가 빠진 '순수한'경제학 운운하는 것은 현실로보나 당위로보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외려 '순수한'경제학 운운하는 담론이야말로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파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아닌지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아울러 정책기획가들의 경제정책이란 것도 아주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문제를 줄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나 정책기획가, 혹은 정치인들이 이러한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국민을 속이는 것을 넘어 자신 스스로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증적인 자료마저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가며 일종의 도그마에 빠져 특정정책을 밀어붙히는 정부의 태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근대학문의 꽃으로서의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학'이다. 도처에 경제와 관련된 도그마로 가득찬 오늘, 속류화된 경제정책의 무서움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는 오늘, '경제신학자'들만이 도처에 판치는 듯한 오늘의 우리사회에 근 10년전 출판된 경제학자의 책이 적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 같다. 일독을 권한다. 

ps. 제목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에 비해 아주 쉬운 책은 아니다.(그렇다고 어려운 책도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입문서'를 기대한 독자라면 얻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원론적 지식이 어느정도 갖춰진 독자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듯. 사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경제학과 경제사에 대한 설명보다 '정치'에 관한 서술 부분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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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타 악티바 : 개념사 6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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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 시리즈 만드는 데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듯한 책세상 출판사의 '비타 악티바'시리즈 중 여섯 번째 책이다. '개념사'라는 제목과 '비타 악티바'(우리말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하는)라는 제목이 함께 쓰여져 시리즈의 지향하는 바가 다소 의문스럽기는 한데,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본서에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내용 또한(!) 그렇다.  

8~90년대의 그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헐겁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21세기형 공안정국 하에서, 매주 주말이면 이런저런 시위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시국에 출간된 본서는, '개념사'라는 시리즈 제목을 통해 속시원한 무엇을 바라고 접한 독자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폭력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소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명징한 비판을 내놓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느 정치학자가 쓴 수필 모음 정도로 읽히는 본서는 다소 중구난방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각 꼭지마다 유기적으로 엮여져 있지도 않은데, 저자 또한 서두에서 그런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맡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폭력의 상대성이랄지 폭력과 권력의 문제랄지 상징적 폭력 문제같은것을 흘러흘러 논하는 본서에서 '폭력'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아무래도 미시적인 부분에 조금 더 천착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 느낌이 상당부분 80년 광주나 9.11사태 등 거대한 폭력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제한적이라는 점, 소음공해랄지 '베토벤 바이러스'에서의 예화를 이용하여 폭력을 해명하는 부분이 두드러진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폭력의 상대적 특성을 날카롭게 분석해놓고는 그 부분에 대해 일정정도라도 매듭을 짓지 않은 채 폭력과 권력의 논의로 넘어가버린다거나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는 힘에 대한 논의와 폭력이 과연 악인가에 대한 논의가 정리되지 못하고 중첩되어버린다는 점은, 본서가 자칫 '미시 폭력에 대한 한담'정도로 읽혀질 소지가 있지 않나 하는 우려마저 자아내게 한다. 

사실 폭력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공론장에서 운위되는 개념중에 그나마 명징한 편이라고 여겨지는 '법'에서 이야기되는 폭력의 정의만해도 한가지가 아니고 이것이 정치학이나 윤리학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아울러 폭력인지 아닌지는 결국 피해자가 결정한다는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의 특수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 개념에 대한 각별히 섬세한 접근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을 '절대적으로 상대적인'개념으로 이해한다거나 무조건 '악'으로 이해한다면 어떠한 법적, 정치적, 윤리적 기획도 올바로 정립할 수 없다. 이러한 '폭력'의 난해함을 감안한다면, 차라리 폭력에 대한 몇 가지 논점과 그 논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두서없이 풀어놓고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려는 저자의 전략이 바람직한 부분도 없지 않겠다. 

해서 본서를 폭력을 해명하고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는 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외려 매주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상황 속에서 폭력이라는 개념의 모순성을 고민하가 시작한, 폭력에 대한 조금 더 깊이있는 논의에 접근하기 위한 징검다리가 필요한 독자에게라면 적격일 것 같다는 소리다. 나쁘지 않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족스러운 책도 아니다. 여력이 되는 독자라면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아렌트의 책이나, 혹은 사카이 다카시의 책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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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의 엣센스 - 쿠바 미사일 사태와 세계핵전쟁의 위기
그레이엄 앨리슨.필립 젤리코 지음, 김태현 옮김 / 모음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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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치학'이라는 장르의 책들이 의례 그러하지만, 본서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무지개 같은'책이다. 집단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주제로 한 본서는, 사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를 소재로 하지 않았다면 경영서나 행정학 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온당할 정도로 다른 학문 분과에 다양하게 응용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한 집단의 전략적 선택을 의례 하나의 동일체로 전제하고 판단하곤 한다. 어떠한 담론이건 미디어의 보도건 이를테면, 한나라당의 전략, 미국의 판단, 일본의 속셈 운운하는 식이다. 아울러 이러한 형식의 판단은 어느정도 충분한 합리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집단, 특히 국가나 기업체같은 고도로 근대화된(그래서 관료화된?!) 단위라면 어느정도 일의적인 결정을 위해 나름의 어떠한 절차적 장치나 문화를 갖추고 있고, 이와 교호적 작용의 결과로 집단 내부의 문화랄까, 정서 같은 것 또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정도의 동질성을 보이는 것도 어느정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집단의 절차적 장치나 결정 논리 또한 그것이 기반한 근대문명에 의거해 대부분 '합리성'이라는 준거틀에 맞추어져 안정성과 지속성을 확보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도태되거나 사라지곤 한다. 이러한 합리성과 일의성이라는 조직의사 결정의 기본적 매커니즘을 통해 우리는 한 조직의 의사결정 방향을 예측하고 평가하게 된다. 저자들은 이처럼 우리가 기본적인 '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조직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합리적 행위자 모델'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모든 집단이 언제나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어느정도 일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외려 그런 상황이 예외적인 경우로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오늘도 초등학교 학급회의에서나 벌어질 법한 눈에 보이는 과오가 국무회의에서도 재방송되는 것을 쉽게 목도하며, 똑똑한 사람들은 몽땅 갖다놓았다고 '가정'되는 학술모임이라던지 국제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보는사람이 심히 민망한 결정들이 횡행함에 의아해하고는 한다. 어떠한 인재(人災)에 대해 모든 세력들이 서로 비난하며, 각 집단의 해명을 듣다보면 정말이지 그 결정에 대해 책임 질 세력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듯한, 마치 그야말로 재앙만이 홀로 남겨져 부유하는 듯한 포스트모던한 상황(?)은 이미 질릴 정도로 종종 벌어지곤 한다. 논자들은 이러한 결정을 어찌저찌 그 집단으로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평가하고는 하지만 아무리봐도 이건 '미친 짓'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평가하는 데에는 다른 렌즈도 존재함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조직행태'모델과 '정부형태'모델이다. 

전자는 조직 자체의 특성에 주목한다. '근대화'된 개인이 합리성이라는 준거틀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려 노력하듯, 조직도 조직자체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 다른 조직보다 힘을 쓰고자 하는 논리, 조직 자체의 메뉴얼에 끼워맞춰 일하고 싶어하는 논리, 조직 자체가 존속하고자 하는 본능 그런 것들이 모여 조직논리를 이룬다. 이러한 조직을 통제하는 힘도 물론 존재하지만, 조직자체가 나름의 논리를 통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에 비한다면 이 부분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후자는 조직 자체가 온전한 하나가 아님을 가정한다. 인간이란 쉽지 않은 존재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완전히 동질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허구에 가깝다. 그러하기에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 하에서도 다양한 투쟁과 음모가 등장하며, 성문화된 절차는 각 개인의 구미에 맞게 변용되고 해석된다. 

이러한 상이한 모델로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파악하면 한 집단의 의사결정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정확해진다. 이러한 이론들을 토대로 한 저자들의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 분석은 상기 이론들의 유용성을 반증하는데, 이 위기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어갔고, 어떠한 비상식적인 결정들이 내려졌으며, 그 와중에 어떻게 해피엔딩(?)으로 봉합되었는지를 저자들은 각 이론을 설명한 후 (책에서의 1,3,5장) 그 이론을 이용하여 풀이한다.(책에서의 2,4,6장) 이를 통한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한마디로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인간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부분 있으며,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조직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이고 예외는 아니겠지만, 오랜기간(아울러 지금까지도) 분단된 사회에서 분단된 사고를 강요받고 '군대논리'라는 투박하고 유치한 논리가 지배해 온 우리 사회의 특성상, 조직에 대한 단선적인 판단이 심각할 정도로 횡행하곤 한다. 문제는 단선적인 판단은 판단을 당하는 조직에게도 재앙이지만, 판단을 하는 주체에게도 상당한 한계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사람사는 동네는 어디든 비슷하다는 속설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다. 사람은, 다른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람이 모인 조직이 뻔히 알면서도 절망의 구덩이로 직행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드물지 않다. 이를 두고 단순히 그 조직이 나쁜놈들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혹은 멍청한 놈들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는 것은 속편하기는 하지만 발전적이지도 못할 뿐더러, 오늘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다. 조직에게 다양한 각도의 렌즈를 들이대는 일, 그래서 조직을 조금 더 잘 이해하는 일은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과 멀지 않아 보이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조직, 나아가 이를 구성하는 인간에 대한 풍요로운 이해를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한다. (뿐만아니라, 이론설명 부분을 제외하자면, 쿠바미사일 사태에 대한 저자들의 설명과 분석은 은근히 박진감 넘친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영화화 되었더라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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