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구'라는 건 '커다란 도랑'이라는 의미이므로 사람과 사람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자신만의 세계가 되어 잠을 자도 깨어 있어도 '자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접할 때는 늘 맞선 볼 때의 심정으로 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47쪽
(상략)자기의식의 결과는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가 공유하는 병이다. 인지, 학문 등 모든 방면의 사물이 진보하면 동시에 이 진보를 이루지 못한 인간은 한 걸음 한 걸음 퇴락하고 쇠약해진다. 세상을 재치 있기 웃어넘긴 소세키의 글 이면에는 이처럼 절실한, 피를 토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48-49쪽
자아나 자의식, 더 나아가 고민이나 고뇌가 문제되는 것도 그런 보편적인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임스에 따르면 사람은 아슬아슬한 갈림길에 맞닥뜨렸을 때 '종교인'이 되거나 '예술가'가 되거나 어느 한쪽으로 갈린다고 합니다. (중략) 소세키와 베버는 모두 자기 이외의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고민의 기원이었는데, 그 때문에 종교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며 갖은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믿는 것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60-61쪽
네 번째 고민거리는 '자아의 돌출'입니다. 자신답게 있고 싶다, 자신을 어필하고 싶다는 아주 강한 자기 현시욕을 갖고 있는데도 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나'로 초연하게 있을 수 없고, 타자의 시선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며, 그 결과 신경과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73쪽
반대로 '온리 원'이 될 수 없는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까지 있고 보면, '그래도 샐러리맨이 마음 편한 돈벌이다'라며 평범한 종신 고용 문화에 만족하고 있었던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만큼 진짜 찾기는 신경을 몹시 피곤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절대로 손이 닿지 않는 목표를 저편에 세워 놓고 영원히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헤겔이 말하는 '불행한 의식'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세상의 일부는 그런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끙끙거림'을 해소하는 치료법을 다룬 책이나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인 사고로 바꿔주는 자기계발서 같은 것을 줄줄이 내보냅니다. 새로운 수법의 '행복론'이지요. 사람들의 머리를 실컷 두드려 패놓고 그 다음에 진통제나 습포제를 파는 그런 '악덕 상술'같은 문화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 자살에 실패한 사람 등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이 시대의 병리로 취급하지 않고...자기다움의 탐구로 내모는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92-93쪽
천하에 무엇이 약이 되느냐 하면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은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은 없다. 예술작품이 소중한 것은 황홀하여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잊고 자타의 구별을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자아, 자각심, 자기의식 등 '진짜 자기'를 찾는 일에 그 정도로 집착했습니다. 이를테면 진짜 찾기의 대장입니다. 그 대장인 소세키가 반대로 '자신을 잊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5쪽
그런데도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이 파탄 나기 직전까지 철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유별난 정열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그 이유를 생각할 때 자꾸 제 머리를 스치는 것은 '거듭나기'라는 말입니다. '거듭나기'는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중요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 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121쪽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인생에서 얼마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왜냐하면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이고,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 같은 것이 뚝 끊어지고 의미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저 혼자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의미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34쪽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신용하고 죽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단 한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진지합니까. '진지함'이라는 말은 바야흐로 다가올 개인이 궁극적으로 고독한 시대에, 타자와의 '공명'을 가능케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소세키가 마음을 의탁한 키워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47쪽
예전에 소세키는 노도 같은 기세로 나아가는 근대문명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나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눈물을 머금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미끄러져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자각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54쪽
다시 말해 지금 우리의 시장경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만성적으로 실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시장경제는 사회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까지 실업률을 높이는 쪽이 부를 극대화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그 정도로까지 노골적으로 변용하고 일탈해 버린 것입니다. -165쪽
그렇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을 소중히 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168쪽
주인공의 인생을 멋지게 좋은 것으로 바꾼 것이 재판관으로서 해낸 업적이나 지위 또는 재산을 축적한 수십 년의 사회적인 '창조'가 아니라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동안 가족에게 배려의 마음을 보여준 '태도'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 역시 인간의 가치는 '창조creative'보다는 '태도attitude'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78쪽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에서도 '태도'와 '존엄'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이 상대가 뭘 하든, 뭘 갖고 있든,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상대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것이고 '태도의 가치'에 한없이 가까운 것입니다. -181쪽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은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은 없다' 소세키가 그린 인물은 자신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몹시 고뇌하는 사람들 뿐이어서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역설'로 쓰인 것으로, 소세키는 자기를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183쪽
계속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좋은 것을 배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라는 인사를 그만두고 "병은 아직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바꾸었다. (중략)
가슴에 폭탄을 안은 상태이고 뭔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 대단합니다. 단순히 신은 역시 존재한다든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든가, 자신은 병에 의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점이 심오합니다. 그것이 소세키의 태도인 것입니다. -188-189쪽
그리고
우리는 덧붙인다. 죽지 마라.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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