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메모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자아의식(self consciousness)은 결국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다."-38쪽
시대는 이미 어중간함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어중간한 심각함이나 어중간한 낙관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자아를 세우는 것이나 타자를 수용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42쪽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매료되는 것은-그것에 몸을 의지하는 정도는 별개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상당히 꼼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으면 좋은가'라는 물음은 영원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닌 마음의 문제의 대부분은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97쪽
그리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만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3 쪽
나 또한 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인 종교'처럼 내 지성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스스로 이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고민을 하거나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불가지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도중에 그만두면 그것이야말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그런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인가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는 타력본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06쪽
사람이 '일을 한다'는 행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117쪽
그래서 나는 '사람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타자로부터의 배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일하는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보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의 꿈을 실현시켜 줄지 그렇지 않을지는 다음 단계의 이야기입니다. -118쪽
사랑은 어떤 개인과 어떤 개인 사이에 전개되는 '끊임없는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쪽이 행동을 취하고 상대가 거기에 응하려고 할 때 그 순간마다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며, 그런 의지가 있는 한 사랑은 계속될 것입니다. -136쪽
단순히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있을 때 '삶'과 '죽음'이 모두 비슷한 무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152쪽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확신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프랭클이 말한 것과 비슷하지만 자기의 의미를 확신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고민하십시오. 나는 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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