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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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항상 우리의 개입을 필요로하지요. 우리가 없어지고 나면, 말은 존재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말이 되어버리고, 드러나지 않는 말은 이미 말이 아니거든요." -136쪽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바람은 저라는 존재를 이해합니다. 동시에 저는 바람을 이해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겁니다. (...)일단 높은 장소에 발을 내딛고, 거기에 집중해서 푹 빠져버리면, 공포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친밀한 공백속에 있습니다. 저는 그런 순간을 무엇보다도 좋아합니다. -190쪽 '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한때, 당시의 책 좀 읽노라 하는 사람들은 다 그랬듯이, 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온전히 반해있었다. 특히 <밤의 원숭이>는 시리즈 광고로 쓰였던 콩트모음이었는데, 그 콩트들은 정말 좋아했다. 있을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꼭 실재처럼 풀어놓는 솜씨는 어쨋거나 예사롭지는 않았으니까. 양사나이는 어딘가에 분명이 있을거라고 시시덕거렸던 기억도 있다. (<상실의시대>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지만.)

하지만, 시간은 내 취향도 바꾸어 놓고, 하루키의 솜씨도 바꾸어 놓았으니 언젠가부터는 하루키도 더이상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하루키의 단편집은 제목처럼 '기묘한 이야기'들은 아닌것 같다. '렉싱턴의 유령'이나 '밤의 원숭이'를 다시 보는듯한 기시감을 겪어야했고, 그다지 독특하다고 느낄만큼 특별한 이야기들도 없었으니. 혹시 장편을 쓰는 중에 진도가 나가질 않아 심심풀이로 쓴 건 아닐까 싶을정도로 평이하다. 그럼에도 판매량은 꽤 되는 모양. 이름값이란 때로 평범함에도 빛을 더해주고, 때로는 잘난 작품을 깎어먹기도 하는 법이다. <도쿄기담집>은 이미 자신이 써 놓은 여러 독특한 이야기들 때문에 바래지는 단편들일게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다지 독특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굳이 '기담'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은 무얼까? 자신의 다른 작품들보다 평범해서 기이하다고 하면 모르겠다.

다섯편의 수록작품 중 맘에 드는 것은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기이한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한 사람을 몽땅 받아들이려는 마음이라고 그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맘에 든다.

뱀발)간혹 거슬리는 번역의 거침. 오탈자는 아니지만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구석들. 급하게 책을 내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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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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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찌 알랴, 이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복수극일 수도 있음을. p.21

밑줄 긋고 싶은 대목이 많은 책이다.

2003년 등단, 시나리오 집필 경력, 현재 영화 연출 준비- 1964년생인 이 작가의 짦은 이력이 <고래>에 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점에서 어슬렁거리며 책을 헤집다가 얼마전의 서평이 생각나 집어들었다. 첫 서른장 쯤을 서서 읽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사갖고 돌아왔다.(어쩌자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산단 말이더냐!)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인물들의 내면 묘사 없이, 감정이입되지 않은채 몰아치는 이야기들은 "매력" 그 자체다.

판타지 소설에 대하 소설을 섞은 듯한 이야기, 진지함을 일부러 떨쳐내는듯 군데군데 끼워넣은 해학, 실존할 것 같지 않은 기이한 사람들, 숨막히게 몰아치는 무수한 사건들. 언뜻 이 속에서 난 천일야화를 읽는 듯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눈으로 본 것 같은 빠른 이야기 전개는 마치 영화 같다.

 

춘희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벽돌을 굽고, 홀로 고독하게 '스러지는' 마지막에 이르러는 눈물 한 방울이 흐르더라.

 

오랜만에 재밌는 이야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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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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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여, 겨울이 왔으니 봄이 멀겠는가.하지만 기억해 두라. 삶에는 봄만이 축복받은 계절은 아니다. 겨울도 그 하루하루를 간절하게 느끼며 살아야 할 안타까운 삶의 시간들이다. 그러니 봄이 닥치기 전에 우리는 겨울을 온몸으로 남김없이 느끼고 향유하도록 애써야 한다. - 140쪽

당의정이다. 영화라는 설탕옷을 입은 심오한 인생이야기, 위대한 철학이야기.

그 설탕옷 때문에 별로 어려운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하지만 행간마다 생각을 넣어야 하기에 넘기다 말고 간혹 연필을 굴려야 했다.  아, 그 영화 그랬지. 아, 그 장면을 이런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구나.... 필자는 '영화를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text로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여 '작품에서는 오직 작가의 뜻을 읽어낼 뿐이지만, 텍스트에서는 우리가 뜻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머릿말은, 완독하기 전엔 오롯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뿌듯하게 느껴진다. 장면장면 감독이 의도했던 의미만으로 읽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보다 더 확장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이 책을 통해 영화는 작품이 아닌 텍스트로도 기능했다.

 잊히지 않는 대목은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대상은 같지 않다는 것.또한 그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운 것은 내 안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개별적 대상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이고, 그를 생각하려면 형의상학적 사고가 필요하며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니까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는 나로 인해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열광해 주지 않는 한 그 존재는 무의미하다. 내 열광 때문에 어떤 가수가, 어떤 배우가, 어떤 노래가 혹은 영화와 드라마가 아름다운 존재로 승화하는 것이니까.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난 내심 안도가 됐다. 내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서 의기소침하지 않아도 좋았으니까. 내 열광 덕분에 어떤 존재는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할 수 있으니 내 존재 이유도 충분한 것 아닌가 싶어져서.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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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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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p.124


김연수의 단편집인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기 위한 준비.
<나는...>을 조금 읽었는데 그 단편집과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짤막한 소설이다. 작가는 이 (중편)소설은 자신의 '팬들을 위한 특별판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편집을 다 읽어야 알겠지만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의 사랑 이야기. 삼각 관계? 그런가...?
진우와 선영과 광수와 그 친구들의 현란한 말장난 혹은 말싸움 속에 작가 김연수의 힘이 있다. 숨차게 뱉어내는 말들은 장황설이 아니어도 설득력이 있고, 비유 하나하나가 다 날카롭다. 80년대 운동했다며 뻐기는 사람들에게는 뼈있는 주정을, 말장난으로 사랑타령하는 그 현학에는 구역질을, 엉뚱한 질투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랑에게는 조롱을. '낭만적 사랑'이란 단지 18세기 자본주의 시작과 함께 '발명'된 '공산품'일 뿐이라는 일갈.


마치 TV 단편극장을 본 것 같은 느낌. 이야기는 단순하고, 결말 또한 예측가능하지만 신선함이 묻어난다. 어느 부분에선가는 당황스럽고, 어느 부분에선가는 우습고, 그런가하면 또 안쓰럽기도 한 이야기.


팬클럽을 위한 소설이 아닌 단편집은 어떤가 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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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 2009년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황안나 지음 / 샨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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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인생이다. 아직도 누군가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그 시간만큼 나는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리라.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털어버려야 한다. p.167

 누군가는 이런 글을 보고 깊이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기행문도 아니고, 음식 소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의식이 넘치는 글도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소소한 기록에서 간간히 눈물을 떨구었다. (늙은게다. 아무때나 울컥하는 이 병은 분명 그 탓이다)

 65세의 할머니가 혼자서 해남 땅끝마을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23일동안 걸었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 앞에서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체력이나 시간 혹은 여행 경비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혼자서 떠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눈물겹다. 혼자 먼 길 떠나고 싶다고, 일상을 털어내고 싶다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건 아님을 알기에 난 그 사실 앞에서 존경을 보낸다. 할머니 정말 대단하세요. 진심이에요.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평생을 살았고, 두 아들의 엄한 어머니로, 또 평생 사업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남편의 치닥거리로 살았다. 여행 중간중간 회고하는 옛 일들이란, 아무리 시대가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나같으면도저히 버텨내지 못했을 고난의 세월이었더라. 아이 갓 낳고 먹을 것 하나도 없이, 아침이면 밤새 입김에 이불깃이 얼어 바작거리는 냉방에서도 견뎌야 했단다. 그런 날들이 평생 계속 되었어도, 월급이 늘 빚쟁이에게 차압당해 가난에 허우적 거렸어도 그녀는 용기를 잃지 않았고,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 고귀한 영혼이라니!

 길에서 만난 많은 친절한 이들, 그녀를 격려하기 위해 하루라도 같이 걷자고 찾아오는 따뜻한 인연들, 혼자 걸어야 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펑펑 우는 며느리. 그들의 모습에 울컥한다. 혼자 떠난줄 모랐던 남편, 스무날이 지나서 응원하러 왔다가 '내가 당신한테 뭘 잘못했는데 이런 짓을 한거야?'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에서도 나는 또 울컥한다.

 그녀의 국토종단은 '혼자'였기에 아름다웠다. 또한 삶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기에 더 아름다웠다. 퇴직 후 그녀는 산을 올랐고, 암벽도 무서워 하지 않았으며, 인터넷 쓰는게 아주 자연스럽고, 인터넷 카페에서도 맹렬히 글을 올리고, 블로그까지 운영하고, 네이게이션을 달았어도 매번 길을 잃는데도 두려워않고 운전을 한다. 아직도 해본 일보다는 해보고 싶은 일들이 더 많다는 그녀는 자신의 꿈과 도전엔 마침표가 없다고 되뇌인다.

 이 모든 것에 어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당당하고 용기있는 그녀에게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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