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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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은 분명히 잘난 척 하는 사람들 꼴을 참지 못하는거다.

이 단편집의 모든 주인공들은 잘난척 하다가 결국 엉뚱한 사람들에게 (혹은 자신이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고야 만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러게 왜 그리 오만방자하게 사는거냐고 소리라도 지를 셈이었을까?

 

이 단편집에 대한 많은 평들이 '대단하다, 재미있다, 치밀하다'로 요약되고,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는 성석제의 추천사도 있지만, 그정도로 대단한지는 모르겠다. 이미 비슷한 많은 이야기들을 경험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또는 샤말란처럼 대단한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아서 내성이 생겼으려나.

 

10편이 모두 잘난 척 하다가 뒤통수 맞은 이야기로 일관한다는 건, 단편집으로선 흠이 될 수도 있다. 10편 중 단 하나 '피부'만이 뒤통수 맞는 사람이 안쓰러울 뿐, 나머지 인물들은 그래도 싸다 싶을 정도로 좀 재수가 없는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인물의 성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내내 같은 패턴이 반복되니 마치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읽는 것처럼 처음의 신선함이 점점 기운을 잃고 급기야는 뻔한 스토리가 내 머릿속에서도 그려지니까. (앗, 감히 로알드 달을 오쿠다 히데오에 비교하다니! 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라면, 그대가 맞다. 하지만 나는 나이므로, 내가 맞다)

 

 

누가 그랬다더라.

그 뮤지컬, 볼 만은 했지만, 볼 가치는 없다.

  

살짝 훔쳐다가 말하자면, 그거다.

재미는 있지만, 굳이 찾아 읽을것 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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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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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다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 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나 전철을 갈아타고, 노력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여론을 따를 줄 알고, 듣고, 조성하고, 편한 사람으로 통하고, 적당한 직장이라도 얻게 되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알고, 이를테면 신앙을 가지거나, 우연히 홈쇼핑에서 정말 좋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하고, 구매를 하고, 소비를 하고, 적당한 싯점에 면허를 다고, 어느날 들이닥친 귀중한 직장동료들에게 오분, 오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할 줄 알고, 자네도 참, 해서 한번쯤은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좀더, 나는 버스를 기다려본다. 열시 반, 2교시가 한창일 시간이다. 다수인 척, 스물서너 정거장이 떨어진 곳에서는-다수가,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수업에 열중해 있을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도 2교시란 게 있을까? 나는 버스를 기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속셈을 모르겠다. -34-35쪽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따.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29쪽

 와아, 잠잠한 숲속으로 들어가 칠년을 매미의 유충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역시나 생각했지만, 나는 말없이 돈을 건네받았다. 의외로 좋은 기분이었다. 백만원을 손에 쥐면 백만원어치의 유전자가 업그레이드 되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의외로 그런게 아닐까, 뒤척이는 중국인 여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계단을 내려왔다. -83쪽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 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6792929921:173834567929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110쪽

 왜 우리일까? 답 같은 건 찾을 수도 없겠지만, 내 결론은 그거야. 뭐?

 너와 나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야. -219쪽

 

책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불편한 마음을 누를 길 없다. 못과 모아이가 언제 또다시 불려나가 맞을까 싶어서 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이 둘은 '그냥' 따를 당하고, 그래서 늘 맞고 지낸다. 이유같은건 없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치수가 사라졌지만, 남은 치수 패거리들에게로 폭력을 꼬리를 물고, 도주 중이던 치수는 잊을만하면 전화하고 나타나서는 다정하게 굴다가 느닷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언제 어떻게 시작될 지 모르는 폭력을 기다리는것은 제삼자인 내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못과 모아이가 치수 패거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들 말고는 모두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핼리를 기다리는 모임과 탁구를 가르치는 세끄라탱과 그의 아이들과 편의점 주인과, 스쳐지나는 사람들까지도 현실적인 존재감이 없다. 인류를 언인스톨할지를 결정하는 탁구경기라니, 터무니 없는 발상 아닌가. 하지만 모두 안개같은 사람들과 현상들 사이에서 그 경기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끝없는 폭력에 길들여진 두 아이는 그 폭력을 피하거나, 대항하거나,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냥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당신도 왕따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다수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인류와 세계가 어느 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좋지도, 좋지 않기도 한 그런 세계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악을 뿌리고, 누군가는 선을 베풀고 있는게 이 세상이란다. 저 대목을 읽으며 뜨끔했다. 모른 척, 아무일도 없는 척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다수편에 서 있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소설들은 박민규의 단편집을 보는 듯, 발랄하고, 엉뚱하다. 소설은 왕따 이야기로 시작하여, 탁구로 끝난다. 결코 왕따에 관한 어떤 답도 보여주지 않는다. 치수는 다시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르고, 치수의 패거리 중 또 누군가가 치수를 팔아서 못과 모아이를 괴롭힐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소설의 결말이 힘이 없다거나, 유아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기 보다는 이미지와 상상과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죄책감의 짜임으로 읽힌다. 그래서 그 결말이 그리 엉뚱하지 않았고, 그네들의 결정도 타당해 보였다.

 박민규의 문체는 여전하다. 여전히 엉뚱하고, 여전히 재기가 넘친다. 상상력이 넘친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듯, 그렇지만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는 이야기들. 뜬금없는 곳에서 문장을 자르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스러운 대화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 작은 폰트의 글자. 간결한 문장은 전혀 아닌데, 그렇다고 늘어지는 문장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것저것 섞인 문장들.

 꽤나 맘에 드는데, 무엇 때문인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좀 힘이 든다.

우선은 작가 박민규를 대하는 기울어진 애정.

라운 상상력들.

전적이고 평범함 문장을 거부하는 대담함.

현실의 이야기 따위 관심없다는 자신만만함.

 

그러면서도 약간은 부족한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역시 말할 수 없는 나의 얄팍한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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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다
조병준 지음 / 디자인하우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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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중독되었다는 조병준의 감성이 넘치는 글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커스를,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서커스를 보여준 이들은 조병준에게

절망스럽게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했더라. 딱 그렇다)

이 책을 읽은것이 벌써 몇 해전이었던가.

다시 읽고 있자니 어찌 이리도 새로운것인지.

처음 읽었을때처럼 난 그저 나도 떠나봤으면...하고 쓸모없는 소망만 중얼거릴뿐.

책이 새로운것마냥, 내 결심이 새롭기만 하지만

또 몇 년이 흘러 똑같은 소망을 중얼거리고 있을까 싶어, 그나마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다.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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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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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얄팍했고, 읽기도 수월했다. 읽은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난 쉽게 이 책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전경린이 이런 작가였던가. 이렇게 섬세한 문체를 구사하던 작가였던가. 아프고 쓰리고 답답함으로 가득한 스무살 여자아이의 내면을 이렇게 촘촘하게 표현하는 이야기를 무어라 말해야 할까.

 

주인공 우수련의 스무살을 지배하는 것은, 집을 떠나 혼자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열망과 온갖 냄새들이다. 앓고 있는 할머니의 악취, 시장통의 냄새, 주변사람들의 독특한 냄새, 소극장과 찾집에 떠도는 냄새, 이웃건물에서 키우는 새의 비린 냄새. 우수련이 묘사하는 냄새는 지극히도 세밀해서 내 코 끝에도 냄새가 스친다.

 

책갈피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맘에 드는 묘사들을 두 번, 세 번 되읽으면서도 난 이 책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음을 깨닫는다. 맵고 짠 내 스무살을 상기했던 탓이었을까? 사실 누구나 그 시기는 맵고 짤 수 밖에 없고, 가슴속에 지옥을 하나 키우는 시간일게다. 지구를 통째로 어깨에 짊어진 듯 무겁기만 하지만, 사실 그건 자신에게만 있는 일도 아니며, 혹은 타인에게 그 짐은 티끌 하나의 무게로 보일 수도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 나이니까.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시기. 무엇을 해도 미숙하지만, 또 무엇이나 다 우습고 유치해 보이는 나이. (내게 그 시기는 정확하게는 스무살 보다 더 빨리 찾아왔지만.)

 

전경린(혹은 우수련)은 자신의 모습은 이미 스무살에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계속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여전히 문득 가슴 속에 천불이 일어나는 시간도 있고, 평온한 날들도 있지만, 스무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십 여 년 만에 만난 동창녀석들은  스무살 무렵의 나는 "참 당돌하다 싶을때도 있었고, 겁이라곤 전혀 없었다"고 말하더라. 어쩌면 그 때의 나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많이 건방졌고, 많이 까칠했으며, 많이 아팠다. 방구석을 파고 들며 살았다. 어쩌면 그건 방구석이 아니고 내 가슴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까칠하고, 건방지고, 아프다. 그러나 그 어떤일을 해도 허술하고, 두려움이 많으며, 까칠한 내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 나는 내가 소망하는것만큼 잘 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전경린의 이 소설은 섬세한 묘사로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스무살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난 이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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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자라는 집
임형남 지음 / 시야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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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기대어 세상을 보는 건축가의 눈은 참으로 따뜻하고 푸근하다. 때로 세상을 매섭게 질타하기도 하는 이 건축가의 글솜씨는 꽤나 매력적이다. 세상을 향한 따뜻함을 잃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후반부 세세하게  집 짓는 이야기- 설계부터 완공까지-를 전문가의 입장으로 풀어 놓은 글을 빼놓는다면, 전반부의 글을 보고 그를 건축가로 알아볼 재간이 있을까? 맑고 고운 언어로 차분하게 풀어 놓는 글솜씨가 부럽다. 후반부는 제천 상산마을 김선생의 집짓기 이야기다. 설계를 위해 의뢰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상상속의 집을 현실화하는 과정들이 세세하고 침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글들이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건축을 '잘 지은 건물'로 보지 않는 건축가의 시선이다.

 

장석주의 <강철로 만든 책들>을 보며 꽂힌소개받은 책 중 하나다. 장석주는 이 책을 읽은 후,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도서관에서 빼들고 읽었는데, 집에 와 찾아보니 책표지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다. 올 초 품절된 이후로는 다시 찍지 않은 모양이다. 아까워라. 건축가가 직접 그린 여러 그림들만으로도 퍽이나 아름다운 책인데...(도서관에서 표지라도 찍어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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