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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평점 :
꿈이 있다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 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나 전철을 갈아타고, 노력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여론을 따를 줄 알고, 듣고, 조성하고, 편한 사람으로 통하고, 적당한 직장이라도 얻게 되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알고, 이를테면 신앙을 가지거나, 우연히 홈쇼핑에서 정말 좋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하고, 구매를 하고, 소비를 하고, 적당한 싯점에 면허를 다고, 어느날 들이닥친 귀중한 직장동료들에게 오분, 오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할 줄 알고, 자네도 참, 해서 한번쯤은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좀더, 나는 버스를 기다려본다. 열시 반, 2교시가 한창일 시간이다. 다수인 척, 스물서너 정거장이 떨어진 곳에서는-다수가,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수업에 열중해 있을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도 2교시란 게 있을까? 나는 버스를 기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속셈을 모르겠다. -34-35쪽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따.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29쪽
와아, 잠잠한 숲속으로 들어가 칠년을 매미의 유충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역시나 생각했지만, 나는 말없이 돈을 건네받았다. 의외로 좋은 기분이었다. 백만원을 손에 쥐면 백만원어치의 유전자가 업그레이드 되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의외로 그런게 아닐까, 뒤척이는 중국인 여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계단을 내려왔다. -83쪽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 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6792929921:173834567929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110쪽
왜 우리일까? 답 같은 건 찾을 수도 없겠지만, 내 결론은 그거야. 뭐?
너와 나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야. -219쪽
책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불편한 마음을 누를 길 없다. 못과 모아이가 언제 또다시 불려나가 맞을까 싶어서 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이 둘은 '그냥' 따를 당하고, 그래서 늘 맞고 지낸다. 이유같은건 없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치수가 사라졌지만, 남은 치수 패거리들에게로 폭력을 꼬리를 물고, 도주 중이던 치수는 잊을만하면 전화하고 나타나서는 다정하게 굴다가 느닷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언제 어떻게 시작될 지 모르는 폭력을 기다리는것은 제삼자인 내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못과 모아이가 치수 패거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들 말고는 모두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핼리를 기다리는 모임과 탁구를 가르치는 세끄라탱과 그의 아이들과 편의점 주인과, 스쳐지나는 사람들까지도 현실적인 존재감이 없다. 인류를 언인스톨할지를 결정하는 탁구경기라니, 터무니 없는 발상 아닌가. 하지만 모두 안개같은 사람들과 현상들 사이에서 그 경기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끝없는 폭력에 길들여진 두 아이는 그 폭력을 피하거나, 대항하거나,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냥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당신도 왕따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다수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인류와 세계가 어느 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좋지도, 좋지 않기도 한 그런 세계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악을 뿌리고, 누군가는 선을 베풀고 있는게 이 세상이란다. 저 대목을 읽으며 뜨끔했다. 모른 척, 아무일도 없는 척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다수편에 서 있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소설들은 박민규의 단편집을 보는 듯, 발랄하고, 엉뚱하다. 소설은 왕따 이야기로 시작하여, 탁구로 끝난다. 결코 왕따에 관한 어떤 답도 보여주지 않는다. 치수는 다시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르고, 치수의 패거리 중 또 누군가가 치수를 팔아서 못과 모아이를 괴롭힐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소설의 결말이 힘이 없다거나, 유아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기 보다는 이미지와 상상과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죄책감의 짜임으로 읽힌다. 그래서 그 결말이 그리 엉뚱하지 않았고, 그네들의 결정도 타당해 보였다.
박민규의 문체는 여전하다. 여전히 엉뚱하고, 여전히 재기가 넘친다. 상상력이 넘친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듯, 그렇지만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는 이야기들. 뜬금없는 곳에서 문장을 자르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스러운 대화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 작은 폰트의 글자. 간결한 문장은 전혀 아닌데, 그렇다고 늘어지는 문장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것저것 섞인 문장들.
꽤나 맘에 드는데, 무엇 때문인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좀 힘이 든다.
우선은 작가 박민규를 대하는 기울어진 애정.
놀라운 상상력들.고
전적이고 평범함 문장을 거부하는 대담함.
현실의 이야기 따위 관심없다는 자신만만함.
그러면서도 약간은 부족한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역시 말할 수 없는 나의 얄팍한 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