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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링 ㅣ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봄과 여름의 사이였다. 물론, 여기서 만났다고 하는 것은 책으로가 아닌 실물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통성명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작년에 내한한 그가 우리 학교에 와서 한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애초에 오에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으므로 그의 문학에 딱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나라 국민에게 소설가라기보다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것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갔다는 쪽이 옳으리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에의 강연회에 대한 감상을 밝히자면, 나는 소설가들이란 다들 소설만 잘 쓰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두서가 없는가 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짧은 강연에서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준비가 애초에 마땅치 않았던지, 하여간 그의 강연은 별로 정리가 되지 않은, 소설을 쓰기 전에 한 뭉텅이로 쌓아놓는 내 메모지를 두서없이 읽어가는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문장들로 이뤄져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인가, 일본의 우익화를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었지만 더불어 그의 소설을 읽을 생각을 싹 없어지게 한 것 역시 부정하긴 힘들다.
그 강연이 끝난 후 일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나는 오에의 책을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편견의 작용인지는 몰라도-말하는 것과 똑같이 정리가 덜 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서히 글에 익숙해져감에 따라 이 소설이 무작정 두서없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촘촘히 짜여 있는 글이며, 아마도 주인공 고기토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식의 구성을 돋보이게 하고자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 책, <체인지링>을 처음 읽는 분들이라면 나의 이런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만 그저 작가가 글을 쓰는 데에 몸을 맞기면 이내 편안하게 그를 따라갈 수 있게 되니 인내심을 가져달라고 말하고 싶다.(나는 그게 안돼서 문제다. 어찌나 고집이 센지)
잠시간의 혼란을 견뎌내면 이내 담담하면서도 영민한 소설가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신기해하며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특히나 고기토(그러니까 오에 본인)의 소년 시절, 그리고 젊은 시절의 일화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고기토도 고로도 대단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산골에서 만났다는 것도 신기했고 말이다. 랭보의 시를 읽고 감동받으며,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고, <숨겨진 거장>을 창조하자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는, 사실 주제와는 조금 다른 관심을 내게 불러일으켰다. 우리 세대에 랭보는커녕, 교과서 외의 시인은 이름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대다수인 현실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사실 나도 그런 부류의 학생이긴 했다.) 그것은 시몬느 보봐르의 <처녀시절>에서 그녀의 영민한 친구들과의 대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간단히 말해, 질투했다, 심하게.
그러나 그런 작은 질투심은 고기토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서서히 잊혀지고(혹은 익숙해지고) 마침내 커다란, 그러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숨겨져있던 주제가 드러난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주제를 드러내지 않는다. 고기토도 노골적으로 ‘내가 고로를 구하지 못했어.’라며 자책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로에 대해 생각하는 고기토의 시선에서 우리는 그의 사랑과 상실감을 느끼고, 고로를 회상하는 일들이 거듭되고 결국 자신의 마음을 진정한 용서의 마음, 혹은 용기의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 역시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격한 과정도, 눈에 보이는 화려한 리턴지점도 아니며 그저 조용히 늙어가는 것처럼, 조용히 우리 자신이 되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 과정은 화려한 성장보다는 조용한 성숙에 가까워, 과연 노작가가 쓸만한 이야기라는 것에 깊이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나는 이런 상실을 아직은 겪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러한 날이 올 때 나 역시 이 노작가처럼 겸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저 쪽’이 그리 멀지 않음을 온 가슴으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될 때, 그러나 반드시 우리 자신은 아니고 이미 저 편으로 건너간 사람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함께하는 나’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겸손하고 착한 작가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그의 가을하늘빛 소설, <체인지링>. 언젠가 상실감에 주저앉아있을 미래의 나에게 이 진솔한 위로편지를 미리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