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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상하게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 나라에 대한 이미지와 그 나라의 문학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독일 사람들은 이성적일 것만 같은데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낭만적인 소설이 등장한데다 이게 엄청난 인기를 끌기까지 했다. 제목에서부터 낭만이 느껴지는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책도 있고, 헤세의 <지와 사랑>(혹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지’보다는 ‘사랑’에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예술적이고 낭만이 넘칠 것 같은 프랑스에서는 <보바리 부인>과 같은 시니컬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그런 것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독일인들은 이성적인 가운데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고, 프랑스인들은 낭만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그 낭만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무튼 이 소설 역시 독일인의 그 순수한 사랑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은 상당히 단순하다. 한 고등학생이 영어선생님과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한 여름의 짧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사랑은 결국 불의의 사고로 인한 영어선생님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스토리만 단순한 것이 아니라 책 두께도 꽤 얇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쉽게 넘어가지 않으며 그 여운은 오래 남는다. 

 화자인 소년이 연인의 죽음 앞에서 그녀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고 줄곧 그가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현재의 상황과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서 구성해낸다. 조금은 복잡하다고도 느껴지는 그 구성 때문에 나는 두어 번 앞으로 되돌아가 책을 다시 읽기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구성이 지나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소설 전채가 결국에는 소년의 회상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소년은 계속해서 연인과의 지난 추억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단테가 그랬던가. 불행한 지금에 행복했던 시절을 말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고. 그러나 그러한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마치 손 안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던 지난날들을 추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소년은 믿기지 않는 상실 앞에서 회상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알게 된다. 연인으로서의 눈물조차 쉽게 내비칠 수 없는 그 시간을 겪어가며 상실의 고통을 아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을 아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자신만의 아지트를 꾸려나가려 했던 소년을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무엇인가를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성정할 수 있는 인간의 비극이라니. 

 죽음이라는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는 소설이라 읽는 내내 크리스티안이 가여웠다. 가장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에도 그 사실을 이미 아는 독자는 다가올 불행을 홀로 예감하며 아릿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렌츠는 독자를 슬프게 만드는 법을 잘 아는 것 같다. 하긴. 이 책은 그가 여든에 쓴 것이라니, 그걸 너무 잘 알 나이이긴 하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딱 그 나이의 소년의 모습이라서 작가의 노년에 대해서는 소설만으로는 쉽게 짐작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우리가 침묵해야만 했던 각자의 순간들을 생각하며, 작가의 내공을 알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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