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뜻을 잘 몰라서 일어나는 혼란은 대체로 내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해결되지만(‘아 그게 그 뜻이었구나‘) 내가 하려는 말을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일어나는 일들(말실수, 오해,
억울함, 답답함)은 사회적 장애를 일으킨다. 나는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느낀다. 말을 하려는 마음이 말보다 늘 한 걸음 빨라서, 엇박자로,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가 다리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는 바람에 넘어지듯이 말을 한다. 제대로된 단어를 얼른찾지 못해 과녁에 맞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다. - P10

어린아이는 언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세상을 배워나간다. 아이는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추론에 의해 말을 익힌다. 단어가 쓰이는 용례를 수집하고 의미를 제련해서 제 것으로 삼는다. 이렇게모은 단어들을 잇고 엮고 쌓아 세계를 구성한다. 어떤 단어를 새로이 알게 되면, 그 단어가 표상하는 영역만큼 세상이 넓어진다. 새로 알게 된 단어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도구가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단어가 없으면, 다른 사람의고급 언어 공격을 받아칠 수도 없고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도 없어 위태롭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필요한 단어가 무엇인지, 그 단어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단어가 ‘엄연하다‘라는 사실을 그 단어로 얻어맞기 전에는 몰랐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전이 있다. - P17

나는 당장 읽지도 않을 책들을 사서 책꽂이에꽂아놓는 것도 좋아하는데, 책을 일종의 외장 메모리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머리에 꽂으면 내 지식이 되는 메모리스틱처럼 여긴다. 그중에서도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사전이 집에 있다면, 테라바이트급의메모리스틱을 갖고 있는 셈이니 얼마나 든든한가(언제 머리에 꽂을지는 알 수 없지만).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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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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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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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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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4

"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느껴졌기 때문이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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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꼰대질이 될까 봐, 더 솔직히 말하면, 꼰대로 여겨지기 싫어서, 누군가 충고나 조언을 청해도 의식적으로 피하며산 지 꽤 되었는데 (네 번 청하면 응하는 것으로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그렇다고 내가 꼰대가 아닌 걸까? ‘타인에게충고하는 행위‘가 꼰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워낙 많이꼽히다 보니,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 꼰대 아님‘ 인증서를 손쉽게 획득하려는 마음이 기저에 있는 건 아니고? 마치 충고만이 꼰대의 전부인 것처럼. 사실 꼰대의특징 중에는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생각과 경험, 지식만이 대체로 옳다고 여기는 상태‘ 또한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특징이 극복하기 더 어렵다고 느낀다.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사는 걸 모르고 사는 것, 이게 가장 두렵다. - P70

의식적인 노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글은 모든 상황과 입장을 전부 담지는 못한다. 어느 한곳에서는 반드시 누수가 일어나 어떤 존재들은 빠져나가고 배제되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표현’을 계속 고민하고 다듬는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D들이 삐쭉댈 만한 말을 최대한 쓰지 않는 것. 누군가 내글을 읽다가 외로워지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것. D가 슬프면 나도 무척 슬플 것이다. D가 아프면 나도 무척 아플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써왔던 말들을 버리고 벼리는 건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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