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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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어느날 우연히 접한 신문에서 본 작품을 알게 되어 접했는데, 작품의 분량과 내용 그리고 줄거리가 그리 

녹녹한 작품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책 읽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책장을 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작품을 손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작품은 특정한 주인공도, 작품을 관통하는 이슈적인 사건 사고들도 없었지만 굳이 주제를 

설정해 작품에 대한 소회를 여기에 제시해 본다면 아마도 ‘발칸반도’의 역사적 변천에 따라 보여지고 있는 

‘드리나 강 다리와 다리 주변에 사는 민초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의 어느 한 작은 마을과 그 곳에 놓여진 다리에 얽힌 작품이지만 

환경적으로는 주변국들의 정치 환경적 배경에 기인한 역사적 사실과 다리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종교와

생활 그리고 그들의 사는 모습 속에 비춰진 여러 실생활에 관한 작품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인 다리가 놓인 곳은 ‘보스니아 내전’이나 ‘코소보 사태’가 일어난 곳으로 

예전에는 '유고슬라비아' 지역이지만, 지금은 7개의 국경선과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그리고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와 2개의 문자를 가진 말 그대로 '인종과 종교의 도가니’지역이다.

이 땅은 오래 전에는 카톨릭, 그리스정교와 이슬람, 유대교인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온 터전이며, 그들만의 

사랑, 미움, 아픔, 믿음 그리고 배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세상의 다른 땅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오스만투르크가 지금의 발칸반도를 지배하던 시절, 보스니아의 '비세그라드' 지역에는 

'드리나 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강은 강가에 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기도 하였지만, 다리로 

인한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은 그 다리를 생활의 일부요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다.

이 다리는 강 주변 지역출신으로, 어린 시절 터키제국으로 끌려가 나중에 술탄의 장군이 된 한 인물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이 그 곳에 다리를 건설하면서 생긴 건축물로 그 다리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재까지도 그 자리에 남아서 지역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지역 민중들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주는 그런 매개체 역할도 했으나 다리가 지어질 때 격심한 

노동의 고통을 참지 못하여 다리를 무너뜨리고자 하던 한 농부의 참혹한 처형도, 반란을 꾀한다는 죄명으로 

잡힌 죄 없는 농부와 나무꾼의 교수대도 모두 이 다리 위에 세워진 아픔도 간직한 장소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포탄에 의해 다리가 절반 이상 파괴되는 슬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작품은 이 모든 것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 ‘드리나 강의 다리는 단순히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이 아닌 그 나라, 그 민족의 애환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이었던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해 본다면, 위와 같은 역사적 아픔을 지니고 있는 드리나 강 지역을 얼마 전까지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슬람, 카톨릭, 세르비아 정교 및 유대교인들이 혼재되어 아귀다툼하는 혼란의 

중심이었지만, 작가는 이곳의 이야기를 우리나라 영화의 동막골’과 같은 시각으로 작품을 그리고 있다.


해당 작품에서도 동일한 아쉬움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정확한 배경에 무지하다 보니 미묘한 부분에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려고 해도 세부적인 사항을 

몰라 약간은 답답함이 밀려오기도 하였으나 나름 자꾸 읽고 느끼다 보니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세세히 

몰라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된 작품이다.

특히, 작품 중반 이후 ‘철도’가 마을 지나가는 것을 소재로 전개되는 내용은 주제가 단순한 노동과 일반적인 

삶 중심에서 정신적인 측면으로 변해가는 내용을 접하면서 왜 본 작품이 문학적인 가치를 높게 평가 받게 

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었다.

 

작품을 읽으며, 우리 민족의 어려움을 대변할 수 있는 ‘다리’를 매개로 한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는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을 읽으며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고 있는 ‘비세그라드 지역’의 주민 정서를 통해 당시 그들의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을 살짝 엿보았는데, 격변기 속 지역 주민들의 삶은 과거 불행하고도 고단한 삶을 살았던 우리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1. 카사바 주민들은 불길한 것을 다시 생각하기 싫어하고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피에는 참된 인생이 조용한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존재하지도 않는 더 확고하고 더 영속되는

   다른 인생을 모색하다가 그 시간을 망친다는 것은 미친 짓이며 쓸데없는 짓이라는 믿음이 흐르고 있었다.

                                                                                                                               (144)

2. 갖가지 법령, 규정, 명령의 망을 쳐서 사람, 가축, 사물 할 것 없이 온갖 형태의 생활을 간섭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의 외형을 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풍속과 습관을 뜯어고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201)


3. 오래 전부터 이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오스트리아 놈들이 

   보스니아로 들어왔지만 터키 황제도 오스트리아 황제도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베그들과 터키의 지주들이

   허가를 했는가 말이오? 또 어제까지도 우리의 라야였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반란을 일으켜 터키 

   제국의 영토를 반이나 빼앗아갔지만 아무도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았지. 이제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세르비아를 치는데 역시 우리에게는 묻지도 않고 대신에 총과 군복을 주며 ....(중략).... 이 곳 국경에서는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닿을지 누가 아느냐 말이다. (436)

 

특히 상기의 내용 중 3번의 내용은 많은 생각을 던져 준 문구였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실제 접해 보시지 않으면 내가 왜 문구를 여기에까지 올리며 감탄을 내 놓고 있는지 모르실 것이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드는 문구 

 

- 허영심이 많은 자는 아첨을 샀고, 우울한 자는 그들의 농담과 익살을 샀으며, 자포 자기한 자는 그들의 

  용기와 시중을 샀다.(사팔뜨기 집시여인에 대한 평가, 281)


- 터키인들이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3가지 사랑, 기침, 가난(371)

 

 

참고로 ‘드리나 강의 다리에 대해 알아보면


드리나 강은 346km에 이른다. 녹색강물로 인하여 세르비아인들은 드리나 강을 일명 <질룐까(녹색)>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류에서 드리나 강은 계곡과 좁은 산골짜기를 통과해 선회하며 흐르고, 그 덕분에 발칸반도

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중 하나로 꼽힌다.


드리나 강에는 ‘피바’와 ‘타라’라는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피바와 타라는 북서 헤르체고비나를 따라 흐르고, 훔 근처에서 합류하는데, 그 합류점이 드라나 강의 시작

으로 간주된다. 그곳에서부터 드리나 강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국경을 따라서 사바 - 보산의 라치 근처

에서 흐르는 - 로 흐른다. 드리나 강을 끼고 있는 주요 도시로는 보스니아의 포차, 고라즈데, 비셰그라드

즈보르니크와 세르비아의 바이나 바슈타와 로즈니차가 있다. 드리나강은 사바강의 가장 큰 지류이다.

 

비셰그라드에 있는 드리나 강을 관통하는 다리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역사적으로 드리나 강은 오랜 옛날부터 서로마와 동로마제국의 자연적 국경이었고, 이후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접경이었다. 오스만의 압제시절 이슬람교의 유입은 오늘날까지도 드리나 강 연안 사람들의 

행동과 삶에 영향을 끼친다.

수세기 동안 이곳에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있었지만 그들의 공존은 심심찮게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드리나 강에서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군 사이에 몇 차례 혈전이 

일어났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1992년부터 1995사이에 일어난 내전 때 포차와 고라즈데에 유엔의 평화

지역으로 선포된 것은 잘 알려진 슬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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